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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48호 : 프린터를 사다

이런 이야기 있다. 어느 선비가 문필가로 유명하신 분을 찾아가 어찌하면 그렇게 명문장을 쓸 수 있냐고 물으니 이 양반이 “나는 붓을 들면 한 번에 글을 완성하지. 글이 끝나면 그제야 붓을 놓지.” 하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뒷간을 다녀온다고 자리를 비운 사이 이 양반 방석을 보니, 밑에 이리저리 줄을 긋고 수정한 탈고 뭉치가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이 천재라고 자랑해놨지만, 사실은 수도 없는 탈고의 과정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퇴고는 작품이 완성되는 마지막 단계가 아니라 시작 단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초고는 늘 실수투성이고 읽어내리기에도 쑥스럽다. 나 같은 경우는 한 달쯤 후에 퇴고하는데 오글거려 환장할 때도 많다. 으~~~

그건 그렇고

글은 일기를 빼고는 모두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독자를 고려해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인류는 수천 년을 글을 써왔지만 지금도 글은 멈추지 않고 써댄다. 모든 예술은 진행 중이다, 그 오랜 세월이면 웬만한 건 다 썼을 듯싶은데 사람들은 아직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으니 대단하지 않나? 한 인간을 우주로 표현하기도 한다. 우주를 써야 하는데 끝이 어디에 있겠나. 나 하나의 삶만 쓰나? 모두의 삶이 글로 흘러나온다. 모두의 삶의 과정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데 오죽 방대하겠나. 당신의 삶이 글로 표현되면 우린 마주 보지 않아도 공감 능력이 발동한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 나와 비슷하네!’ 하면서 의문도 갖는다. 웃기도 하지만 울기도 하는 묘한 문자들의 배합은 신비롭다.

그건 그렇고

프린터를 샀다. '복합기' 라고 하나? 어쨌든 살림에 타격이 크다. 손가락만 빨고 살지도 모르겠다. 되도록 안 사려고 했는데 영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디지털시대라 화면으로 읽기도 하지만 뭔가 부족한 생각에 만족스럽진 않다. 그래도 책장을 넘기는 재미가 있어야 하고, 미소가 번지는 책 냄새가 좋다. 이사 가면 단골 도서관부터 찾아 찜한다. 좋은 책이 낚시질에 걸리는 날에는 기분이 좋다. 신간이나 인기 도서도 좋지만, 무한히 쌓인 책들을 다 내 것이라 상상하면 커피가 무지 달다. 쓰고 나면 종이로 꼭 확인하는 버릇이 있는데, 화면에서 못 보던 잘못 쓴 부분이 바로 눈에 들어온다. 예술인은 이런 생각을 한다. ‘과연 내 작품을 보려고 사람들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낼까?’ 이런 생각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 인쇄해서 독자로 돌아가 읽어본다. 그때가 탈고의 시작이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프린터를 샀는데 손에 쥐고 있는 마우스가 덜덜 떨렸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에잇!

그건 그렇고

그러면 프린터를 샀다는 건 뭘 쓰겠다는 것인데 뭘 쓰나? 몇 년 전 사회생활을 할 때는 그래도 내가 쓴 글이 월간지나 공공단체가 발행하는 책자에 한두 편 실리는 걸 봤는데 지금이야 뭐 개털이니 막막하기도 하다. 얼마 전 지인의 딸이 책을 냈다고 한 권 가져왔는데 학교생활을 정리한 수기와 여행 소감들이 실려있다. 요즘은 ‘1인 출판시대’라는 말이 와닿았다. 정말 좋은 세상이다. 블로그에 몇 자 적어도 책으로 내준다는 곳도 있고 여럿이 한편씩 원고를 내어 한 권으로 출판물이 나오기도 한다. 공인 서적은 아니지만, 종이 위에 내 작품이 실려 출판되는 뿌듯함은 소주를 부른다. 예전에는 글이 잘 나와도 소주, 못 나와도 소주였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도 소주로 탕진하고 나서 반지하 소굴로 터덕터덕 걸어오다, 골목 어귀에서 쳐다보는 나처럼 지친 가로등이 다시 펜을 잡게 했던 낭만의 시절. 지금도 조금은 보이지만 철학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던 반항심 많은 녀석이 나였다. 100만 원에 월세 10만 원에 살던 몇 평 되지도 않는 반지하 단칸방 곰팡이가 왜 그리도 포근했는지.

그건 그렇고

예전에 내 홈페이지 배너로 쓰려고 명언(?)을 하나 남겼는데 ‘책이 사람을 만들지만, 사람이 책을 쓴다.’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나의 책사랑은 유별나서 어머니가 친구들에게 빌려온 책을 가져다 주시며 쥐어박던 생각이 난다. 나가서 좀 놀라고 잔소리에 잔소리를 하셨지만, 어르고 달래도 학교 도서관은 내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감성이 풍부해서? 상상력이 뛰어나서? 며칠 전 안산에 있는 대동서적이라는 서점에서 무려 17만 원이 넘는 책을 샀다. 상품권이 생겨 과소비 한 번 했다. 물론 내 돈도 조금 들어갔지만…. 예전이라면 많았을 텐데 몇 권 안 된다. 그만큼 책값이 오른 것이다. 요즘 웹툰이 인기라고 해서 뭔 내용인지 만화도 몇 권 샀더니 집안 거덜 나게 생겼다.

그건 그렇고

프린터로 처음 인쇄할 글을 쓰고 있다. 젊은 놈이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가 싶지만, 일기나 잡글이 아니면 나름 신중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떠오를 때 항상 메모하기에 가방엔 항상 펜과 종이가 있다. 외출할 땐 휴대전화 다음에 챙기는 것이 펜이다. 그것들이 모이면 포화상태가 되고 정리할 때가 온다. 버릴 것은 버리고 가져다 쓸 놈은 쓴다. 문장 건지기다. 괜찮은 글도 있지만 대부분 잡글이고 그림도 있다. 잘 정리하다 보면 하나의 글이 이뤄지는데 인쇄하면 탈고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의 반복이 나의 일상이고 습관이다, 날짜나 양을 정해 놓고 쓰면 안 써지는 경우가 많지만 중간중간 쓰면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건 그쯤 한가지 생각에 꽂혀있다는 뜻이다. 이런 문장 건지기는 시간이 아주 빠르게 흐른다.

그건 그렇고

프린터의 기능을 봤는데 전선도 필요 없는 WI-FI 가 되고 핸드폰으로 그 자리에서 인쇄된다. 이젠 사진을 찍자마자 인쇄가 되는 시대다. 기가 찬다. 알아서 양면인쇄도 하고 신분증만 넣어도 앞뒤 복사를 스스로 한다. 팩스만 안 되고 다 된다. 예전 도트프린터로 어머니 교재를 만들 땐 찍찍거리며 한참을 인쇄했는데 지금은 복사기 수준이다. 기술은 빠르게 변하고 인간은 더더욱 편한 길로 걸어간다. 인쇄도 없어진다는데 종이책이 보물 될 날이 오지 않을까? 손편지가 뭉클한 것과 달리 기계가 찍어내는 활자는 빠르지만 건조하다. 그만큼 초고를 보기 위해 빨리 쓰게 되고 탈고과정이 길지 않게 됐다. 아는 분께 선물을 하나 준비했는데 말 나온 김에 손편지 하나 넣어 드려야겠다, 뉴스와 달리 내가 선물을 준비할 만큼 세상엔 좋은 사람들 천지다. 이런 분들께는 인쇄하지 말고 손으로 편지를 써보자. 쓰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

2022.0915 10:09 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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