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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 귀뚜라미 보일러

얼마 전 눈이 온 뒤 강추위가 전국을 덜덜 떨게 하던 날 옆집 할머니가 찾아왔다. 두문불출하신 분인데 웬일인가 해서 나가봤더니 보일러가 고장이 났는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는다. 집주인한테 말하라고 했더니 대신 해달란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다. 여긴 부천이고 집주인은 대구에 산다. 집주인은 수리를 하라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보일러 회사에서는 수리가 아니라 보일러를 통째로 교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보일러실에 가보니 보일러 내부에 수직으로 뻗어 서있는 두께 1Cm정도의 파이프에서 물이 물총을 쏘듯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미세한 구멍이라 물줄기는 길었다. 테이프로 감아도 보고 덜덜 떨면서 20여분 손을 댔지만 허사였다. 다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거니 중고 보일러를 알아보란다. 사방팔방 전화를 해서 알아봤지만 취급하지 않는 단다. 나는 보일러 회사에 전화를 걸어 저 얇은 파이프만 교체하면 되지 않겠느냐 물었더니 비웃는다. 결국은 50만원이 넘는 새 보일러로 갈아야만 했는데 집주인은 곧 철거되는 동네에서 무슨 새 보일러로 바꾸느냐며 험한 소리를 한다. 나의 인내심은 거기서 철거됐다. 온수 파이프 하나로 할머니와 내방이 같이 쓰기 때문에 나 역시 온수를 쓸 수 없어서도 그랬지만 괘씸했다.

 “이 양반아! 고등학교 선생이란 양반이 그게 할 소리요? 할머니가 추워서 덜덜 떨고 있는데 집주인이 돼가지고 적극적으로 해결할 생각은 안 하고 그게 무슨 소리요? 세 들어 사는 사람은 얼어 죽어도 된다는 말이요? 배웠다는 양반이 어째 위아래도 없고 그리 무책임합니까?”

결국은 할머니와 집주인이 반반씩 새 보일러 값을 내기로 하고 끝났다. 당장 할머니가 추위로 덜덜 떠니 교체할 수밖에. 얼마나 억울한 세입자의 처지인가. 나는 그날 옆집 할머니가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다.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곧장 보일러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아저씨! 작은 파이프에 1mm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구멍도 수리 못하면 그게 대기업이요? 창피한줄 알아야지. 썩어 문드러진 기업 같으니라고. 자동차 부품 하나가 문제를 일으키면 새 차를 뽑으란 말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나라에서 알아준다는 귀뚜라미 보일러라는 회사가 작은 구멍하나 수리 못하고 부품교체도 못하면 그게 기업이요? 작은 문제만 생겨도 수십만 원을 들여 새 보일러로 교체하라는 말뿐 다른 해결책도 없는 단순무식한 기업 아니요?”

나는 방송 3사 게시판과 소비자보호원 등에 민원을 넣고 싶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왜 자기 회사가 그렇게 컸는지 모른다. 물건을 팔 때는 온갖 아양은 다 떨면서 문제가 생기면 배 째라는 식이 대한민국의 대기업이다. 그들이 생산하는 걸 써야하고 요구하는 대로 비용을 내야하는 소비자를 대상으로 노예계약을 맺고 기생하는 벌레와 같은 기업들이다. 참으로 추악한 귀뚜라미 보일러다. 보일러를 교체하고 간 뒤 하나하나 사용법을 알려주고 방으로 돌아오니 손이 시커멓다. 할머니가 오죽하면 나를 찾아 왔으며 얼마나 추웠겠는가. 몇 시간 후 다시 할머니가 문을 두드렸다. 고맙다며 야쿠르트 두 개를 주고 갔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사람들이 왜 셋방살이 탈출을 꿈꾸겠는가. 더러운 집주인 때문 아닌가. 집주인 말대로 ‘어차피 동네가 철거되는 마당’인데 나도 막나가기로 마음먹었다가 접었다. 같은 놈 될까봐. 고등학교 선생이라는 집주인의 제자들이 스승이 얼마나 추악한지 깨우쳤으면 한다.

그건 그렇고...

맹자의 사단설 중 첫째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이란 말이 있다. 불쌍한 이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다. 남의 불행을 내가 당한 것처럼 느끼지 못하면 사람이라 부를 수 없다는 뜻이다. 직접 도움을 주지 못해도 남에게 일어나고 있는 불행을 본다면 마음으로 기도하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몇 년 전 신길역에서 철로로 떨어진 아주머니를 구한 적이 있다. 부평방향 급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 승강장에서 아주머니가 철로로 떨어졌다. 내가 서있던 곳은 부평행 가장 뒤 칸이고 철로는 꺾어져 열차가 들어오는지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복선이라 어느 때 열차가 올지도 몰랐지만 나는 단숨에 건너편 철로로 뛰어가 아주머니를 어깨에 올려 승강장 위로 밀어 올리고 구두를 주워 던져놓고는 곧바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도 그렇고 부축하고 있는 아들로 보이는 사람도 그렇고 둘 다 정신지체로 보였다. 걷는 것도 이상히 걷고 고맙다는 표정이나 말은커녕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옆에 있던 선배가 미쳤냐고 물었지만 나는 행복했다.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는 시간이 0.3초라고 한다. 0.3초 후에는 망설이게 된다는 것이 심리학이 내놓은 말이다.

근래 들어 남의 불행에 무감각해졌었다. 스스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기도 하지만 그러든 말든 내 알바 아니었다. 남의 불행에 관심을 갖든 갖지 않았든 내게 돌아오는 것도 없었다. 나도 먹고 살기 힘든데 남이 문제인가. 그러나 예수님이든 공자님이든 부처님이든 하나같이 남을 위해 살라는 말뿐이다. 게다가 무엇인가를 바라고 도우면 의미가 없다는 말씀이다. 스스로 가난할수록 도우란 말을 나는 오늘 새긴다.

그건 그렇고...

고기를 먹은 지 오래 되어 동네 마트 정육점엘 갔다. 5천원 어치 삼겹살을 달라했더니 담뱃갑 두 개도 안 된다. “혹시 돼지비계만 파시나요?” 안 판단다. 미안하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산책삼아 재래시장엘 가야겠다. 이천 원이면 두 근은 산다.

그건 그렇고...

4월이 열흘 정도 남았는데 영하의 기온이다. 게다가 오늘 저녁엔 폭설이 내린단다. 선 세대가 버린 자연은 후대로 남고 후대가 자연을 복구해야 한다. 물려줄 유산이 파괴한 자연 뿐이다. 불쌍타. 지구를 병들게 하는 것은 쉽지만 복구는 막막하다.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은 강대국대로 기후조약을 파기하고 후진국은 공해를 내뿜는 개발 중이고 우리나라는 눈치나 보고 수천 년의 문화재를 매몰시키며 강토나 파헤치고 있고.

그건 그렇고...

그나저나 이사는 어디로 가야하나.


그건 그렇고 : 2010.03.17 17:28 윤 안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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