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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0 11:58

이사를 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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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가며

일교차가 크다. 가스 밸브를 잠갔으니 오늘은 좀 껴입고 자야겠다. 이 방에서 마지막 밤이다. 짐은 모두 묶고 담아 정리를 했으니 내일 이사차가 오면 바로 실으면 된다. 이글도 이 방에서 마지막 글이다. 4년 가까이 살며 생활비를 벌기도 좋은 인연을 만나기도 했다. 특히 공부를 참 많이 했던 4년 이었다. 그리고 눈물과 웃음이 공존했던 추억이 깃든 쪽방이었다. 죽음의 고비도 넘겼고 세례를 받았던 곳이다. 17년을 살았던 부천도 이 방과 같이 떠나게 된다. 이사 올 때나 지금이나 동네는 조용하다. 근래 들어 이곳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 이삿짐 나르는 소리를 들어오다 이젠 내가 이사를 가게 됐다. 아파트에 환장한 나라가 싫다.

그건 그렇고...

단골 가게에 들러 이사를 간다고 인사를 했더니 난리가 났다. 왜 갑자기 가게 되느냐고. 선물로 소주를 줄까 딸기를 줄까 묻는다. 책을 묶을 끈도 빌려줬다. 몇 시간 후 쓰레기봉투로 끈 값을 대신 냈다. 어차피 안산으로 가면 쓰지도 못하는 쓰레기봉투다. 언제나 물물교환이 가능한 희귀한 가게다. 집 앞 카센터 아저씨도 왜 갑자기 가냐고 묻는다. 커피를 권한다. 앉아 소담을 나누고 다시 방으로 들어서는데 쌓여 있는 짐들이 어색하게 보인다. 앞집 할아버지가 사과를 두 개 준다. 잘 가서 잘 살라는 말도 덤으로 주신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든 말만 듣고 서두르면 손해다. 충분한 의논도 없이 급한 마음에 뱉는 말들이 많은 피해를 준다. 역시 말은 조심할 일이다. 여러모로 이번 이사는 출혈이 크다.

그건 그렇고...

휴대전화에 이어 TV를 청산하려고 TV에 폐기물 처리 스티커를 붙여 내 놓았는데 금세 사라졌다. 누가 그 빠른 시간에 가져갔을까? 부디 생활비에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그 TV는 20여 년 전 내가 하사시절 효도용으로 어머니께 사드린 TV다. “GoldStar”가 명확히 박혀있지만 화질은 끝내줬던 TV다. TV는 인간을 추하게 만든다. 정보화? 컴퓨터는 있으니 정보는 알아서 찾으면 된다. 술자리에서 드라마 이야기가 나오면 할 말이 별로 없었는데 이젠 그 별로도 없어지리라. 그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하는 것이 낫다. 인터넷 전화 070을 쓰고 있는데 저것도 계약기간이 끝나면 버릴 것이다. 차라리 우표가 낫다.

그건 그렇고...

옷은 장애인협회에서 설치한 재활용 통에 넣고 여러 가지를 버렸다. 모두 필요한 사람에게 갈 것이다. 쓰레기는 거의 없고 모두 재활용 가능한 것들만 버리게 됐다. 집 안에서 쓰레기가 나오는 것에 대해 민감하다. 좀처럼 쓰레기는 나오지 않는다. 짐 많은 것처럼 추접한 것이 없다. 이사 할 때마다 짐이 줄어 좋지만 책이 늘어 부피는 비슷하다. 책상과 침대만 나가면 이사의 50%는 끝난다. 나머진 책이다.

그건 그렇고...

일주일 넘게 밥을 못 먹고 있다. 올 1월 겪었던 최악의 건강상태로 복귀한 듯하다. 매우 힘들다. 내일 이사도 걱정이다. 공부고 일이고 효도고 사랑이고 건강해야 하는 것들이다. 희망도 건강해야 품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사 후 어머니께 다녀올 생각이다. 이사도 돕지 못했는데 어디에 사시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 뭐든 본연의 마음,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다. 원래 냉정하고 차가웠던 나로 돌아가야 할 때다. 별다른 흔들림은 없다.

그건 그렇고...

우리나라 대학은 배움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취업이 목표다. 그렇다면 명패를 바꿔야 하지 않나? 서울취업원, 연세취업원, 이화여성취업원... 대학생들은 자칭 지성인이라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썩어 문드러진 개인주의, 사회문제에 대한 무관심, 선거에 대한 멸시 등 좁은 그릇 안에서 스스로 먹고 살 길만 채찍질 한다. 태어난 나라의 한글도 모르는 자들이 외국어에 미쳐있고 요즘 요구하는 것이라 말하며 피한다. 한 학기에 천만 원을 내며 다니면 지성인 인가? 취업전문학교생들이 무슨 지성인인가. 과거 선배들이 참으로 위대해 보이는 오늘이다.

그건 그렇고...

글이 길어진다. 이러다 날 새것다. 아니, 날 새고 싶다.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다. 나를 위해줬던 사람들,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 또 이곳에서 내가 돕던 사람들 모두가 떠오른다. 냉동고에서 꺼낸 소주가 다 녹았다. 시원하게 한 잔 한다. 17년. 정든 부천. 정든 사람들. 급하게 떠나 미안타.

2010.04.15 21:35 風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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