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46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그건 그렇고 - 말과 글

정보화 시대에 정보가 생산하는 개인주의를 눈과 귀로 만나면 정(情)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하루에도 수없는 정보들이 쏟아지고 엄청난 소식들이 누리터와 미디어통신선을 통해 영상으로 문자로 전해진다. 걸러내기 벅찰 정도로 끝없이 생산되거나 재생산된다. 걸러내고 판단하는 건 개인의 몫이다. 정보를 걸러내고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판단하는 건 사람들의 지적수준이 다르듯 사람마다 다르다. 이런 정보들로 틀에 갇히기도 하고 없던 고정관념을 스스로 뇌에 박아 새기기도 한다.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다르면 거부하기도하며 받아들이기 쉬운 또는 받아들이고 싶은 정보와 지식만을 섭취하려 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이라 말할 정도로 정보는 많다. 자리 잡고 있던 이념이 붕괴되기도 하고 없던 이념이 새로 생겨 세상을 편짓는 눈을 만들기도 한다. 단계적이고 부동적인 지식축적방식이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축적방식으로 변했고 지역적 특성은커녕 IT 발전으로 지도상 국내외 경계선도 없어졌다.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전자우편이나 누리터에 올라온 글을 통해 그 사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철학교류도 쉽다. 하지만 컴퓨터 화면 속의 글이나 신문기사 따위를 통해 사람을 결정짓는 오판의 연속선상에서 산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판하지 않는 눈, 즉 정보를 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스스로 만든 지혜에 달려있다.

그건 그렇고,

성대를 울려 혀를 통해 입술을 지나 소리를 내면서 전달하는 방식과 문자를 이용해 글로 전달하는 방식은 차이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쓴 글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 글로 쓴 단어나 문장 그대로 우리는 발음도 하지 않으며 어휘도 다르며 억양과 음의 높낮이도 다르다. 토론이나 학술회에서 자료용으로 들고 나온 참고자료용 문서를 보고 읽지 않는 이상 우리는 글로 쓴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 당신이 쓴 일기나 글을 소리내어 직접 읽어보라. 평상시 그런 억양, 그런 단어선택, 그런 말투로 말하던가?

글쓰기보다 말하기가 편한 사람은 말이 나를 전달하는 도구로 더 효과적이다. 그러나 말주변이 없는 사람은 글이 더 편한 의사전달 도구가 된다. 그러나 요즘은 정보화 시대라 그런지 글이 우선 되는 경우가 많다. 말이 먼저 나왔고 그 뒤에 문자가 발명 됐다. 문자는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체계다. 그러나 생각을 적을 수 있음에 유연성이 좋고 다듬기도 좋다. 문자는 신체적, 거리적 특성 등으로 직접 만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내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다. 이 문자를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 될 목적으로 출판이 발명 되었고 제3자가 편집하는 언론이 등장하면서 문자는 진실이냐 거짓이냐 하는 논쟁에 늘 휘말려 살고 있다. 특히 이미 죽은 사람의 글은 진실을 따지기도 모호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이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했다는데 정말 그랬는지 아니면 주변 장수(만호(萬戶) : 종4품 무관벼슬)가 직접 한 말인지 이순신의 말을 만호(萬戶)가 전한 것인지 모른다. 나의 추론은 죽음 이후 그 사실을 알아 챈 장수 중 한명이 지시했다는 이론을 가장 신빙성 있다고 생각하지만 무엇으로 관련 글들을 증명할 텐가.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살아나 증언하지 않는 한 모른다.

경제적 손실을 줄이기 위해 전화통화 대신 통신기기를 이용해 문자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하면서 같은 내용의 글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보낼 수 있게 됐고 의사소통을 위한 글은 짧아졌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성싶은 공적이고 중요한 내용은 다중영상통화를 이용해 대화하며 녹화한다. 그러나 공적이지 않은 개인적인 말은 대부분 글로 적어 블로그나 누리터에 올려놓는다. 나를 표현했다고 하더라도 글은 나의 육성이 주는 느낌을 온전히 실을 수 없다. 글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읽는 사람이 인지하고 이해하지 않는 이상, 글은 언제든 오해와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다. 잘 이해하고 수용하거나 버릴지, 아니면 그 불씨에 불을 지펴 화근을 만들지는 전적으로 스스로 만든 지혜에 달려있다.

그건 그렇고,

사적인 내용을 담은 편지를 우표를 붙이며 보내는 나를 미개인으로 보는 눈들도 있다. 심지어 우체국 직원이 궁금해 묻기도 한다. 며칠 전엔 물어 볼 것이 있어 모 통신사 대리점에 가서 상담을 했는데 여사원에게 "휴대폰 없이 사는 사람도 있나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TV도 없다고 말하면 그녀는 뭐라고 할까? 몇 군데 돌아다녔는데 모두 그 여사원처럼 퉁명스럽게 말하거나 귀찮아해서 친절하다는 인상을 받은 곳이 없다. 이를 지인에게 말해줬더니 행색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풀어 말해, 너덜거리는 오래 된 칙칙한 옷에 그것도 대충 걸쳐 입어 제멋대로인대다가 긴 머리를 묶고 있고, 노숙자 내지는 경제적인 하층민으로 봤을 거란 이야기다. 기회가 되거나 아니면 호기심이 발동하면 세탁소와 미용실을 거쳐 정장을 입고 가볼 생각도 마구 일지만 그런 일은 없을듯하다. 구두나 정장은 내겐 있지도 않고 세탁소나 미용실에 쓸 돈 있으면 신영마트(단골가게)에 가서 소주나 두어 병 사올 일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든다. 그 불친절한 통신사 사무실들에 서류로 문의를 하면 어떤 반응이 올까? 내 경험으로는 글로 물었을 때 글로 답이 오는 경우는 모두 친절하게 답이 온다.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글예절’이 회사규정이자 인간들의 ‘글관습’이다. 그러나 상대가 없는 글에 대한 반응은 천차만별이고 다양한 군상을 볼 수 있다. 나는 글 쓰다 쉴 때 글을 쓴다. 몰두해서 글을 쓰는 일로 머릿속이 피곤해지면 넋두리나 늘어놓는 ‘잡글’을 지금처럼 쓴다. ‘잡글’로 나를 판단하는 것은 금물일뿐더러 나를 표현하기 위한 나의 모든 작품도 나를 모두 표현하지 못한다. 말과 글은 여기서 차이난다. 그럼 말은 나를 모두 표현할 수 있는가?

그건 그렇고,

말을 새겨듣고 몰입해서 이해하려 하는 귀는 아무리 말주변이 없는 사람의 말도 정확히 알아듣는다. 그런 귀는 말주변이 뛰어난 사람의 말도 가려들으며 왜곡 점을 짚어 낼 수도 있다. 그런데 읽는 눈이 밝으면 어떨까? 글을 만날 때 읽는 눈이 밝으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것은 글에 국한 되어 있는 것이다. 눈앞에 놓인 글 이외의 것을 읽어 낼 수 있는 눈은 마음에 있다. 읽고 있는 글 외의 것을 그 글을 기준으로 상상하고 추론하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읽어낸 이외의 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는 것은 저자에 직접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문자가 규정짓지 못하고 말로 온전히 드러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를 만나도 그를 알 수 없다는 오류가 있지만 서로는 마음을 갖고 있기에 마음으로 대화하면 충분히 그를 알 수 있다. 그 마음이 하는 일을 돕는 도구가 글이고 말이지 글과 말이 마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평생 수십만 통의 편지를 주고받아도 사람하나 알기는 쉽지 않다는 걸 우리는 역사 속에서 과거 기록들을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그건 그렇고,

정보를 잘 걸러내는 눈, 정보를 왜곡하고 사실을 확인하지 않는 눈, 의미 없이 정보를 주물러 임의대로 퍼뜨리는 입, 바른 말을 고깝게 듣는 귀, 참 삶을 위한 맑은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음은 전적으로 스스로 만든 지혜가 조율한다. 피아노 조율사는 음을 잃어버려 조율을 해도 제 음을 내지 못하게 된 줄은 가차 없이 끊어 버린다. 말과 글은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줄이다. 통하기 싫어 끊어 버리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하고 싶어서 있는 줄이다. 제 음을 내지 못하는 마음은 없다. 이해가 가는가.

사랑이 위대하다고 말하는 건 말과 글이 고개를 숙이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아도 읽지 않아도 너의 마음과 내 마음이 통하면 한마음 아닌가? 마음이 같으니 하고 싶은 말도 같다. 마음이 다르면 뱉는 말은 모두 갈등이고 싸움이다. 너의 글을 읽는 마음이 다르니 너에게 글을 쓰는 마음도 다르다. 말과 글은 그저 도구일 뿐이다. 너와 내가 가까워지고 행복을 위한 도구도 되지만 서로를 해치는 흉기도 되기 때문이다. 불과 같고 물과 같다. 하지만 불이나 물이 재해로 와 내게 주는 상처보다는 말과 글이 주는 상처가 더 깊다. 그러나 말과 글이 사람의 생명을 살린다는 아름다움도 갖고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말과 글은 신중히 써야 한다.

그런 면에선 이런 ‘잡글’이 편하다. 한번에 써내려가기 때문에 스트레스 해소도 되고 퇴고 따위의 지끈 거리는 혈압상승은 없기 때문이다. 문득 이따위 ‘잡글’보다는 격이 있는 글과 말의 전파를 위해 부단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말과 글’이라는 도구를 잘 다듬어 다른 사람들도 잘 쓸 수 있도록 내놓는 사람들. 그들은 누구인가?

그건 그렇고,

배가 고프다. 마음이 고픈 것보단 낫다. 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는데 무엇인가로 마음이 가득 차있다. 맥박이다. 숨 쉬는 기쁨이 심줄들을 매초 튕긴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라는 말보단 “나는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다.”가 더 좋다. 근래 건강이 조금씩 나아짐을 새록새록 느낀다.

그건 그렇고,

시계를 본다.

오후 들어 6시간 넘게 앉아있다. 더 앉아 있어도 내 엉덩이는 건재하다. 시계를 본 이유는 밝았던 창문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시계와 달력이 없던 집에 시계와 달력이 놓이게 된 건 때를 맞춰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생겼기 때문이다.

바쁘다.

언제부턴가 “할 일이 밀려있다.”는 말을 안 하게 됐다.
대신 “오늘 할 일은 다했다.”라고 마음으로 말한다.
일이 분에 넘치게 많다는 건 문제가 있다. 내가 일을 처리할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일이 필요 이상으로 많다는 것이다. 그건 내 일이 아니다. 나는 일에 치어 살다가 뜨고 싶지 않다.
하루를 잘 산다고 생각한다.
할 일은 스스로 약속한 시간까지 열심히 하고 이외에는 나를 찾는 일을 한다.
나를 찾는 일도 내 일이긴 하다. 잠자는 것도 내 일이니까.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을 조금씩 당기고 있다. 하루를 잘 살기위한 육신의 충전이 잠이지만 지나치면 독이고 외관상 잠든 내내 시체와 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잠들기 전 드리는 가톨릭 기도문이다. 기도서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우린 지금
아니면,
오늘 잠들면 내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소식지를 통해 고속도로 사고소식을 보면
매초,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약한 존재임을 늘 느낀다.
살아 있음에 감사드림은 이 ‘잡글’을 쓰는 내내 갖는 감정이다.
따라서
내 삶 속에 내가 쓰는 글과 뱉는 말에 대해 늘 반성하고 성찰하지 않음은 시체와 같다.
누군가에게 실언했다면 되돌릴 수 없다. 이미 말하고 쓴 것은 벌어진 사실 그 자체다.
모두 과거다. 1초전도 과거고 눈 깜짝하는 행위의 시간도 과거로 간다.
지남에 대해 잘못은 없는지 늘 돌이켜 성찰하는 사람이 백만장자보다 편히 잠든다.

그건 그렇고,

말은 말씀이 될 수 있다. 말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말씀은 아무나 함부로 못함을 알면 말은 무서운 것이다. '말'을 표기하는 '문자'를 쓰는 손은 말씀을 쓰는 손과 다르다. 말은 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며 되돌릴 수 있으나 말씀은 되돌릴 수 없다. 시대가 인정한 가치있는 글(기록)도 마찬가지다. 인류가 만든 역사서에 말보다는 말씀이 많다. 말은 소멸 되나 말씀은 소멸 되지 않으려는 특성이 있다. 차이를 아는가?

그건 그렇고,

‘그건 그렇고’라는 ‘잡글’을 연재한지 2년이 다 되어 간다. 다음 ‘잡글’엔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를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로 재해석해서 ‘잡글’을 써 볼 생각이다.

왜?

말과 글은 무한한 생산력을 갖췄고 의미가 담겨있고 누구나 공평하게 갖고 있는 도구니까.

위에서 엉덩이가 건재하다고 썼는데 이젠 엉덩이가 아프다. 의자를 떠나야 것다.


2010.10.18 19:38 윤영환 안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