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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4 05:10

화구(火口)

조회 수 13983 추천 수 6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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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구(火口)


화(禍)는 부르거나 당하는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원인이 어디에 있든 대책 없이 당하는 것이다. 교통사고나 천재지변으로 당하는 화(禍)도 있지만, 삶속에선 다가올 화(禍)를 예측할 수도 있다. 원인을 안다면 원인을 급히 풀어 면해야 하지만 대부분 화(禍)를 당한 후에 움직인다. 믿고 있는 신에게 기도를 하거나 갑자기 종교를 갖기도 한다. 또는 무당을 찾아가 길흉화복(吉凶禍福) 점하여 굿으로 빌거나 부적을 받아오기도 하고, 당사자에게 찾아가 직접 사과하기도 한다. 외에도 여러 방면으로 화(禍)를 면하려 애쓴다.

세상은 점점 빠른 속도를 원하고, 자고 일어나면 신기술이 여기저기서 개발되어 있고, 어떤 분야 건 하루빨리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느림은 어리석은 단어로 전락했고, 일이 벌어졌을 때 한 번 더 생각하는 사람은 느린 자로 도태되어 무리를 떠난다. 무리에 남아있는 자들은 도태 되지 않기 위해 늘 준비되어 있어야하고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마음이 급해지며 급한 마음에 화(火)를 자주 낸다. 이에 화(禍)를 면하기 위한 “처세술” 같은 임기응변에 도움을 주는 책들이 서점엔 봇물을 이루고 있다. 사랑도 “나 사랑해?”라고 물었을 때 그 즉시 대답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고, 역시나 그 즉시 가버리는 속전속결의 사랑시대다. 뭐든 빨리 말해야 하기에 깊은 말이나 문장은 좀처럼 듣도 보도 못한다.

화(火)가 화(禍)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느끼지만 화(火) 역시 탐욕에서 나오지 않겠는가. 이 순간, 이 자리, 이것을 갖고 싶어서 또는 저 순간, 저 자리에 올라야 하기에 잦은 문제는 대충 대화술이나 배워 그때그때 모면하면 되는 것이다. 상대에게 지기 싫어 화(火)를 지르고, 허섭스레기 같은 자존심 때문에 화(火)를 지른다. 내가 내지르는 화(火)는 물같이 사는 사람에겐 늦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자연스러운 낙엽에 불과하다. 그러나 나무같이 사는 사람의 마음을 태울 수 있으며, 불같이 사는 사람의 마음을 복수심으로 채울 수 있다. 따라서 화(火)를 내지르는 불장난은 사람끼린 해선 안 되는 일이다. 고요한 내 마음에 누군가 뜬금없이 나를 해하려 불을 지른다면 세상 그 누가 좋아라고 하겠는가만 내 마음이 물로 가득이라면 그 화(火)도 재울 수 있다.

물은 탐욕이 없어 채워지면 더 채우려 하지 않고, 돌 사이사이를 흘러 다음 빈자리로 흘러가 채운다. 늘 아래로 흐르며 인간이 손대지 않는 한 역류하지 않는다. 끝내 바다에 다다르면 나(我)는 없어지며 바다더러 나를 찾아 달라 떼쓰지 않는다. 이것을 자연(自然 : 스스로 그러하다.)이라 한다. 마음을 물과 같이 한다면 화(火)도 지를 필요 없고, 화(禍)를 면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 노자의 뜻이 아닐까.

불씨가 남아있는 담배꽁초 하나가 금수강산을 태울 수 있듯이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마음을 태우고 번져, 걷잡을 수 없는 화(禍)로 돌변해 나를 덮칠 수 있다. 먼데서 원인을 찾고, 가산을 탕진하거나 목숨까지 버려가며 화(禍)를 면하려 하는 어리석은 짓은 말자. 인간이 내지르는 화(火)는 모두 내 몸에서 가장 가까운 입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땅이 주는 좋은 음식이 들어갔으면 불을 뿜지 말고 고마움을 입으로 흩뿌리자. 그러나 삶속에서 내가 뿜어낸 화(火)가 화(禍)로 돌아와 스스로 피하지 못할 땐, 묵언의 고마움으로 맞이하는 것도 내 화구(火口)를 막는 덕이다.


2008.09.19 00:25 윤영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