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05.29 05:43

예민한 ‘분’

조회 수 128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예민한 ‘분’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믿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갑절은 예의 바르다. 몸에는 온통 보수적이고 체제 순응적인 습이 배어 있어 예의범절에 어긋난 언행은 어지간해서는 하지 않는다.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지 않으면 결단코 음식을 먼저 먹지 않는다.

이 ‘예의범절’이란 녀석은 또렷하기보다는 막걸리처럼 뿌옇고 흐릿하다. 법보다는 관행에 가깝고 경험에서 비롯된 게 많아 사람마다 기준도 들쑥날쑥하다. 감각에 가까운지라,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몸과 마음이 곧바로 익숙한 쪽으로 쏠린다. 말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그런데 가끔 무엇이 예의 있는 언행일지 멈칫하는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이다.

어른 두분을 모시고 식당에 갔다고 치자. 식당 직원이 “몇분이세요?”라 묻는다면 당신은 뭐라 답을 하는가? 나는 이때 참 난처하더라. “세분요”라고 하면 나도 높여 말하는 거라 민망하고, “세명요”라거나 “세 사람요”라고 하면 어른 두분을 싸잡아 낮추는 것 같아 머뭇거려진다. 그렇다고 “두분과 한명요”라고 하면, 말도 구차해 보이고 바쁜 직원에게 복에 없던 덧셈을 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 그래서 속으로 ‘역시 난 비겁한 길만 택하는군’ 하면서 “셋이요!”라고 한다.(모래야,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쪼잔하냐?)

인간은 당연한 듯이 이 세계를 나와 남, 자신과 타인으로 분별한다. 게다가 한국어는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양의 질서를 촘촘히 갖추고 있다. 높여야 할 상대와 낮춰야 할 자신이 한 덩어리 말에 뭉쳐 들어갈 때 허점을 보인다. 반갑다, 무질서한 질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3225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9802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4789
3194 ‘이’와 ‘히’ 風文 2023.05.26 1399
3193 “힘 빼”, 작은, 하찮은 風文 2022.10.26 1403
3192 혁신의 의미, 말과 폭력 風文 2022.06.20 1404
3191 사수 / 십이십이 風文 2020.05.17 1407
3190 인쇄된 기억, 하루아침에 風文 2022.08.12 1408
3189 지슬 風文 2020.04.29 1409
3188 마녀사냥 風文 2022.01.13 1410
3187 ‘~스런’ 風文 2023.12.29 1410
3186 삼디가 어때서 風文 2022.02.01 1411
3185 남과 북의 협력 風文 2022.04.28 1412
3184 ‘폭팔’과 ‘망말’ 風文 2024.01.04 1413
3183 가족 호칭 혁신, 일본식 외래어 風文 2022.06.26 1414
3182 통속어 활용법 風文 2022.01.28 1415
3181 무술과 글쓰기, 아버지의 글쓰기 風文 2022.09.29 1418
3180 북한의 ‘한글날’ 風文 2024.01.06 1418
3179 영어 공용어화 風文 2022.05.12 1421
3178 1.25배속 듣기에 사라진 것들 風文 2023.04.18 1423
3177 ‘나이’라는 숫자, 친정 언어 風文 2022.07.07 1425
3176 ‘건강한’ 페미니즘, 몸짓의 언어학 風文 2022.09.24 1425
3175 1도 없다, 황교안의 거짓말? 風文 2022.07.17 1426
3174 공적인 말하기 風文 2021.12.01 1428
3173 드라이브 스루 風文 2023.12.05 143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