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05.22 06:13

단골

조회 수 152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단골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결혼할 사람이 있었다. 다섯살 무렵. 아버지와 옆 마을 아저씨는 자식들이 크면 결혼시키자는 약조를 맺었다. 풉, 가난뱅이들의 정략결혼이라니. 이듬해 겨울, 어머니는 그 아이가 많이 아파 단골무당을 불러 굿을 한다고 하니 같이 가자고 했다. 단칸방 귀퉁이에 앉아 두려운 눈으로 무당의 푸닥거리를 보았다. 며칠 후 그 아이는 죽었다.

애초에 ‘단골’이란 말은 굿을 하거나 점을 칠 때 자주 부르는 ‘무당’을 뜻했다. 지금은 자주 가는 가게라는 뜻으로 일반화되었다. 손님도 주인을 보고 단골이라 하고, 주인도 손님한테 단골이라 한다. 서로가 서로를 단골이라 부르니 재미있다. 어디서든 ‘갑을’을 따지는 사회에서 이런 말이 또 있을까.

‘단골’은 사랑과 닮았다. 그냥, 좋다. 왜냐고 물으면 달리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그게 단골이다. 더 맛있는 집이 널려 있건만, ‘왠지 모르게’ 그 집이 편하고 맛있고 먼저 떠오르고 다시 가고(보고) 싶어진다.

횟수는 안 중요하다. 뜨문뜨문 가도 애틋하다. 규격화된 맛과 정해진 응대 절차를 따르는 체인점이 단골이 되기는 쉽지 않다. ‘맛집’이나 ‘핫 플레이스’와도 다르다. 그 장소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는 느낌, 그 공간의 역사에 나도 동참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단골의 심리적 조건이다.

울적하게 앉아 맥주 몇병을 세워두고 있는 나에게 단골집 주인이 “오늘은 비참하게 앉아 있네”라 한다. “그렇게 보여요?” 하며 같이 웃는다. 얼굴이 불콰하도록 먹고 나서려는데, 그냥 가라며 등을 떠민다. 내 삶은 단조롭긴 하지만, 행복하다. 무도한 시대를 버티는 아지트, 단골.


  1. ∥…………………………………………………………………… 목록

    Date2006.09.16 By바람의종 Views52986
    read more
  2.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Date2007.02.18 By바람의종 Views199537
    read more
  3.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Date2006.09.09 By風磬 Views214512
    read more
  4. ‘시끄러워!’, 직연

    Date2022.10.25 By風文 Views1512
    Read More
  5. 너무

    Date2023.04.24 By風文 Views1516
    Read More
  6. 정치의 유목화

    Date2022.01.29 By風文 Views1517
    Read More
  7. '넓다'와 '밟다'

    Date2023.12.06 By風文 Views1517
    Read More
  8. 할 말과 못할 말

    Date2022.01.07 By風文 Views1520
    Read More
  9. 지명의 의의

    Date2021.11.15 By風文 Views1521
    Read More
  10. 헛스윙, 헛웃음, 헛기침의 쓸모

    Date2023.01.09 By風文 Views1524
    Read More
  11. 울타리 표현, 끝없는 말

    Date2022.09.23 By風文 Views1526
    Read More
  12. 표준말의 기강, 의미와 신뢰

    Date2022.06.30 By風文 Views1527
    Read More
  13. 언어적 자해

    Date2022.02.06 By風文 Views1528
    Read More
  14. 단골

    Date2023.05.22 By風文 Views1528
    Read More
  15. 비는 오는 게 맞나, 현타

    Date2022.08.02 By風文 Views1529
    Read More
  16. ‘~면서’, 정치와 은유(1): 전쟁

    Date2022.10.12 By風文 Views1531
    Read More
  17. 인기척, 허하다

    Date2022.08.17 By風文 Views1536
    Read More
  18. 웃어른/ 윗집/ 위층

    Date2024.03.26 By風文 Views1536
    Read More
  19. 후텁지근한

    Date2023.11.15 By風文 Views1537
    Read More
  20. 기림비 2 / 오른쪽

    Date2020.06.02 By風文 Views1538
    Read More
  21. 한자를 몰라도

    Date2022.01.09 By風文 Views1540
    Read More
  22. 아이 위시 아파트

    Date2023.05.28 By風文 Views1540
    Read More
  23. 맞춤법을 없애자, 맞춤법을 없애자 2

    Date2022.09.09 By風文 Views1543
    Read More
  24. 국가의 목소리

    Date2023.02.06 By風文 Views1546
    Read More
  25. 한국어의 위상

    Date2022.05.11 By風文 Views1549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