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113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25배속 듣기에 사라진 것들

나는 말이 하염없이 느리다. 사이버대학에 올린 내 강의 동영상을 보다가 곧장 게시판에 항복 문서를 올렸다. ‘가만히 듣다 보면 어느새 졸음이 밀려옵디다. 재생 속도를 1.25배로 하니, 졸음이 조금 늦게 오시더군요.’

‘보통’ 속도로 보는 건 손해다. 1.25배속으로 봐도 ‘줄거리 파악’에 아무 어려움이 없다. 출연자의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신경질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바쁜 시간을 알뜰하게 아껴 쓴다는 실용주의자의 자부심을 심어준다.

여기에 맛을 들이면서 영상예술에 대한 감각이 변질되더군.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있으며,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착각 말이다. 속도를 높일수록 우리 귀는 내용(메시지)만을 쫓는다. 조각난 작품을 읽고 재빨리 주제를 파악하는 걸로 국어 실력을 가늠하는 것처럼, 줄거리만 간추리면 영상을 다 본 것. 목소리나 말의 속도, 음색 같은 건 선물을 싼 포장지일 뿐.

우리는 줄거리, 핵심 내용, 주제를 뽑기 위해 영상을 보는 게 아니다. 작품 자체가 갖는 고유한 물질성, 질감, 현장성 같은 것에 녹아 들려고 본다. 우리가 예술에 다가가는 이유는 그 속에 낱낱의 고유한 삶의 형식들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느리고 어눌하고, 어떤 생각이 다른 생각을 간섭하고 뒤엉키는 그 머뭇거림의 형식 자체에 마음이 격동되기를 바라며. 형식에 대한 무시는 예술을 메마르게 한다. 말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 있는 허공과도 같은 빈틈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속도를 늘릴수록 우리는 말해지지 않은 것, 표현되지 않은 것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에 더 근접해 있다는 걸 망각하게 된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43205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9737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4863
3234 교열의 힘, 말과 시대상 風文 2022.07.11 1080
3233 과잉 수정 風文 2022.05.23 1081
3232 정보와 담론, 덕담 風文 2022.06.15 1081
3231 1도 없다, 황교안의 거짓말? 風文 2022.07.17 1081
3230 외래어의 된소리 風文 2022.01.28 1083
3229 혼성어 風文 2022.05.18 1083
3228 정치와 은유(2, 3) 風文 2022.10.13 1084
3227 아니오 / 아니요 風文 2023.10.08 1084
3226 김 여사 風文 2023.05.31 1087
3225 “영수증 받으실게요” 風文 2024.01.16 1089
3224 갑질 風文 2024.03.27 1089
3223 반동과 리액션 風文 2023.11.25 1091
3222 호언장담 風文 2022.05.09 1092
3221 몸으로 재다, 윙크와 무시 風文 2022.11.09 1092
3220 날씨와 인사 風文 2022.05.23 1094
3219 분단 중독증, 잡것의 가치 風文 2022.06.09 1096
3218 까치발 風文 2023.11.20 1100
3217 '바치다'와 '받치다' file 風文 2023.01.04 1102
3216 ‘이’와 ‘히’ 風文 2023.05.26 1103
3215 ‘거칠은 들판’ ‘낯설은 타향’ 風文 2024.01.09 1104
3214 ‘가오’와 ‘간지’ 風文 2023.11.20 1106
3213 말의 미혹 風文 2021.10.30 110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