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103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25배속 듣기에 사라진 것들

나는 말이 하염없이 느리다. 사이버대학에 올린 내 강의 동영상을 보다가 곧장 게시판에 항복 문서를 올렸다. ‘가만히 듣다 보면 어느새 졸음이 밀려옵디다. 재생 속도를 1.25배로 하니, 졸음이 조금 늦게 오시더군요.’

‘보통’ 속도로 보는 건 손해다. 1.25배속으로 봐도 ‘줄거리 파악’에 아무 어려움이 없다. 출연자의 목소리가 가늘어지고 신경질적으로 들리긴 하지만, 바쁜 시간을 알뜰하게 아껴 쓴다는 실용주의자의 자부심을 심어준다.

여기에 맛을 들이면서 영상예술에 대한 감각이 변질되더군. 내용과 형식이 분리될 수 있으며, 형식보다는 내용이 더 중요하다는 착각 말이다. 속도를 높일수록 우리 귀는 내용(메시지)만을 쫓는다. 조각난 작품을 읽고 재빨리 주제를 파악하는 걸로 국어 실력을 가늠하는 것처럼, 줄거리만 간추리면 영상을 다 본 것. 목소리나 말의 속도, 음색 같은 건 선물을 싼 포장지일 뿐.

우리는 줄거리, 핵심 내용, 주제를 뽑기 위해 영상을 보는 게 아니다. 작품 자체가 갖는 고유한 물질성, 질감, 현장성 같은 것에 녹아 들려고 본다. 우리가 예술에 다가가는 이유는 그 속에 낱낱의 고유한 삶의 형식들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느리고 어눌하고, 어떤 생각이 다른 생각을 간섭하고 뒤엉키는 그 머뭇거림의 형식 자체에 마음이 격동되기를 바라며. 형식에 대한 무시는 예술을 메마르게 한다. 말은 단어와 단어 사이에 있는 허공과도 같은 빈틈과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속도를 늘릴수록 우리는 말해지지 않은 것, 표현되지 않은 것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에 더 근접해 있다는 걸 망각하게 된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1. ∥…………………………………………………………………… 목록

    Date2006.09.16 By바람의종 Views39970
    read more
  2.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Date2007.02.18 By바람의종 Views186545
    read more
  3.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Date2006.09.09 By風磬 Views201553
    read more
  4. CCTV

    Date2013.05.13 By윤안젤로 Views27754
    Read More
  5. 8월의 크리스마스 / 땅꺼짐

    Date2020.06.06 By風文 Views1433
    Read More
  6. 4·3과 제주어, 허버허버

    Date2022.09.15 By風文 Views1213
    Read More
  7. 3인칭은 없다, 문자와 일본정신

    Date2022.07.21 By風文 Views907
    Read More
  8. 24시 / 지지지난

    Date2020.05.16 By風文 Views1020
    Read More
  9. 1일1농 합시다, 말과 유학생

    Date2022.09.20 By風文 Views716
    Read More
  10. 1도 없다, 황교안의 거짓말?

    Date2022.07.17 By風文 Views989
    Read More
  11. 12바늘을 꿰맸다

    Date2010.12.19 By바람의종 Views12763
    Read More
  12. 1.25배속 듣기에 사라진 것들

    Date2023.04.18 By風文 Views1035
    Read More
  13. -화하다, -화되다

    Date2009.08.07 By바람의종 Views9439
    Read More
  14. -지기

    Date2012.05.30 By바람의종 Views11267
    Read More
  15. -씩

    Date2010.01.23 By바람의종 Views9209
    Read More
  16. -시- ① / -시- ②

    Date2020.06.21 By風文 Views1584
    Read More
  17. -스럽다

    Date2010.08.14 By바람의종 Views8954
    Read More
  18. -분, 카울

    Date2020.05.14 By風文 Views1464
    Read More
  19. -가량(假量)

    Date2010.06.20 By바람의종 Views10314
    Read More
  20. (밤)참

    Date2006.11.30 By風磬 Views6115
    Read More
  21. (뒷)바라지

    Date2006.11.16 By風磬 Views6904
    Read More
  22. (공장)부지

    Date2007.10.13 By바람의종 Views7560
    Read More
  23. '첫'과 '처음'

    Date2008.09.18 By바람의종 Views8653
    Read More
  24. '지'의 띄어쓰기

    Date2009.08.05 By바람의종 Views9091
    Read More
  25. '전(全), 총(總)' 띄어쓰기

    Date2009.09.27 By바람의종 Views14926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42 143 144 145 146 147 148 149 150 151 152 153 154 155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