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04.14 06:29

어쩌다 보니

조회 수 149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사람들이 묻더라. 지금 하는 일을 어떻게 하게 되었냐고. 뭔가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이유를 기대하면서. 이를테면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거나(풉), 공부에 필요한 끈기를 타고났다거나(우웩) 하는 거 말이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식으로 미래를 쫀쫀하게 설계하며 사는 건 거짓말이거나 자기애가 강하거나 겁이 많은 게 아닐까.

중3 때 금오공고를 가려고 했다. 박정희의 전폭적 지원으로 세운 학교라 학비와 기숙사비가 전액 면제였다. 거길 갔다면 노숙한 기능공으로 살고 있겠지(그것도 괜찮았겠다). 담임이 피식 웃으며 일반고를 가랬다. 갔다. 대학도 그랬다. 적당히 국어 선생이나 하며 살려고(미안, 국어 선생님들) 국문과에 가고 싶다고 하니 담임은 무심히 허락을 해줬다(상담 없이!). 어쩌다 보니 대학원에 갔다. 졸업하자마자 몇년을 직장생활을 했다. 어찌저찌하여 다시 선생을 했다. 나도 배운 적 없는 글쓰기를 허덕대며 가르치고 있다(미안, 학생들). 매주 이 칼럼을 쓰는 것도 어쩌다 보니 하게 된 일. 이 모든 것의 출발은 그게 아주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싫지만은 않아서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 힘으로 돌파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삶의 우연성과 복잡성을 깨닫기란 발가락으로 귀를 파는 일보다 어렵다. 운명은 타인들과의 우연한 만남과 조응으로 이루어지나니, 지금 내 모습이 어찌 나의 것이겠는가. ‘현실’을 받아들이되 얽매이지 않으려면, 순간순간 만났던 타인의 음성을 다시 듣고 싶다면, ‘어쩌다 보니’라는 말을 내뱉어보시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2867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9423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4400
2314 억수 바람의종 2007.12.31 6752
2313 억수 風磬 2007.01.19 8739
2312 어학 바람의종 2010.08.25 7588
» 어쩌다 보니 風文 2023.04.14 1497
2310 어줍잖다, 어쭙잖다 / 어줍다 바람의종 2009.07.10 12437
2309 어이없다 風文 2024.05.29 93
2308 어안이 벙벙하다 바람의종 2008.01.25 15918
2307 어수룩하다와 어리숙하다 바람의종 2010.01.10 9937
2306 어버이들 風文 2021.10.10 876
2305 어버이 바람의종 2008.03.20 7799
2304 어미 ‘ㄹ게’ 바람의종 2010.05.06 8782
2303 어미 ‘ㄹ걸’ 바람의종 2010.04.25 10689
2302 어미 ‘-우’ 바람의종 2010.07.30 8597
2301 어미 ‘-디’ 바람의종 2010.07.20 7342
2300 어미 ‘-네’와 ‘-군’ 바람의종 2010.11.01 7920
2299 어미 ‘-ㄹ지’,의존명사 ‘지’ 바람의종 2010.01.27 13390
2298 어물전 바람의종 2007.08.02 7349
2297 어명이요!, 어명이오! 바람의종 2012.09.06 10681
2296 어머님 전 상서 바람의종 2012.01.23 9386
2295 어린노미·넙덕이 바람의종 2008.07.12 6526
2294 어리숙하다, 어수룩하다 바람의종 2010.10.16 12183
2293 어리숙, 허수룩 / 텁수룩, 헙수룩 바람의종 2009.02.02 921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