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04.14 06:29

어쩌다 보니

조회 수 1195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사람들이 묻더라. 지금 하는 일을 어떻게 하게 되었냐고. 뭔가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이유를 기대하면서. 이를테면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거나(풉), 공부에 필요한 끈기를 타고났다거나(우웩) 하는 거 말이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식으로 미래를 쫀쫀하게 설계하며 사는 건 거짓말이거나 자기애가 강하거나 겁이 많은 게 아닐까.

중3 때 금오공고를 가려고 했다. 박정희의 전폭적 지원으로 세운 학교라 학비와 기숙사비가 전액 면제였다. 거길 갔다면 노숙한 기능공으로 살고 있겠지(그것도 괜찮았겠다). 담임이 피식 웃으며 일반고를 가랬다. 갔다. 대학도 그랬다. 적당히 국어 선생이나 하며 살려고(미안, 국어 선생님들) 국문과에 가고 싶다고 하니 담임은 무심히 허락을 해줬다(상담 없이!). 어쩌다 보니 대학원에 갔다. 졸업하자마자 몇년을 직장생활을 했다. 어찌저찌하여 다시 선생을 했다. 나도 배운 적 없는 글쓰기를 허덕대며 가르치고 있다(미안, 학생들). 매주 이 칼럼을 쓰는 것도 어쩌다 보니 하게 된 일. 이 모든 것의 출발은 그게 아주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싫지만은 않아서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 힘으로 돌파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삶의 우연성과 복잡성을 깨닫기란 발가락으로 귀를 파는 일보다 어렵다. 운명은 타인들과의 우연한 만남과 조응으로 이루어지나니, 지금 내 모습이 어찌 나의 것이겠는가. ‘현실’을 받아들이되 얽매이지 않으려면, 순간순간 만났던 타인의 음성을 다시 듣고 싶다면, ‘어쩌다 보니’라는 말을 내뱉어보시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40097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86678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1660
3124 자백과 고백 風文 2022.01.12 983
3123 오염된 소통 風文 2022.01.12 1084
3122 공화 정신 風文 2022.01.11 1225
3121 띄어쓰기 특례 風文 2022.01.11 1413
3120 올바른 명칭 風文 2022.01.09 839
3119 한자를 몰라도 風文 2022.01.09 1127
3118 일고의 가치 風文 2022.01.07 886
3117 할 말과 못할 말 風文 2022.01.07 1076
3116 공적인 말하기 風文 2021.12.01 1153
3115 더(the) 한국말 風文 2021.12.01 923
3114 지명의 의의 風文 2021.11.15 1216
3113 유신의 추억 風文 2021.11.15 1008
3112 주어 없는 말 風文 2021.11.10 913
3111 국민께 감사를 風文 2021.11.10 1076
3110 방언의 힘 風文 2021.11.02 1181
3109 평등을 향하여 風文 2021.11.02 1262
3108 왜 벌써 절망합니까 - 4. 선한 기업이 성공한다 風文 2021.10.31 838
3107 외부인과 내부인 風文 2021.10.31 1193
3106 개헌을 한다면 風文 2021.10.31 864
3105 소통과 삐딱함 風文 2021.10.30 910
3104 말의 미혹 風文 2021.10.30 1019
3103 난민과 탈북자 風文 2021.10.28 100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