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3.04.14 06:29

어쩌다 보니

조회 수 140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사람들이 묻더라. 지금 하는 일을 어떻게 하게 되었냐고. 뭔가 필연적이고 운명적인 이유를 기대하면서. 이를테면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거나(풉), 공부에 필요한 끈기를 타고났다거나(우웩) 하는 거 말이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식으로 미래를 쫀쫀하게 설계하며 사는 건 거짓말이거나 자기애가 강하거나 겁이 많은 게 아닐까.

중3 때 금오공고를 가려고 했다. 박정희의 전폭적 지원으로 세운 학교라 학비와 기숙사비가 전액 면제였다. 거길 갔다면 노숙한 기능공으로 살고 있겠지(그것도 괜찮았겠다). 담임이 피식 웃으며 일반고를 가랬다. 갔다. 대학도 그랬다. 적당히 국어 선생이나 하며 살려고(미안, 국어 선생님들) 국문과에 가고 싶다고 하니 담임은 무심히 허락을 해줬다(상담 없이!). 어쩌다 보니 대학원에 갔다. 졸업하자마자 몇년을 직장생활을 했다. 어찌저찌하여 다시 선생을 했다. 나도 배운 적 없는 글쓰기를 허덕대며 가르치고 있다(미안, 학생들). 매주 이 칼럼을 쓰는 것도 어쩌다 보니 하게 된 일. 이 모든 것의 출발은 그게 아주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싫지만은 않아서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기 힘으로 돌파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삶의 우연성과 복잡성을 깨닫기란 발가락으로 귀를 파는 일보다 어렵다. 운명은 타인들과의 우연한 만남과 조응으로 이루어지나니, 지금 내 모습이 어찌 나의 것이겠는가. ‘현실’을 받아들이되 얽매이지 않으려면, 순간순간 만났던 타인의 음성을 다시 듣고 싶다면, ‘어쩌다 보니’라는 말을 내뱉어보시라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47437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193941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08916
136 달맞이꽃 바람의종 2008.01.20 6329
135 부리다와 시키다 바람의종 2008.01.20 8304
134 말차례 바람의종 2008.01.20 488226
133 안시성과 아골관 바람의종 2008.01.19 6700
132 며느리밥풀 바람의종 2008.01.19 5916
131 말과 글 바람의종 2008.01.19 4078
130 윽박 바람의종 2008.01.18 10184
129 성별 문법 바람의종 2008.01.18 6826
128 압록강과 마자수 바람의종 2008.01.18 6838
127 나무노래 바람의종 2008.01.17 7601
126 굴레와 멍에 바람의종 2008.01.17 7541
125 물혹 바람의종 2008.01.16 5695
124 미래시제 바람의종 2008.01.16 7535
123 여우골과 어린이말 바람의종 2008.01.16 6620
122 쇠뜨기 바람의종 2008.01.15 7130
121 그치다와 마치다 바람의종 2008.01.15 7312
120 쓸어올리다 바람의종 2008.01.15 8676
119 과거시제 바람의종 2008.01.14 8030
118 예천과 물맛 바람의종 2008.01.14 8600
117 열쇠 바람의종 2008.01.14 7865
116 가와 끝 바람의종 2008.01.13 6720
115 맞부닥치다 바람의종 2008.01.13 736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43 144 145 146 147 148 149 150 151 152 153 154 155 156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