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143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다음 소희’에 숨은 문법

특성화고 3학년 소희는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가 인터넷 해지를 원하는 고객을 ‘방어(방해? 저지?)’하는 부서에서 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는 청소년 노동자의 죽음이 누구의 책임인지 탐색해 올라간다. 하지만 모든 걸 숫자로 치환하는 세상에서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숫자가 책임자다. 사회를 ‘돌아가게 하고’ 사람을 ‘작동’시키는 스위치는 숫자다. 이제 우리는 사랑에 가슴 두근거리지 않는다. 성과지표 합격률 취업률 가입률 지지율 인상률 연봉 같은 것들에 가슴이 뛴다.

영화의 매력은 제목에서 나온다. 피해자를 내세우고 ‘그다음 피해자는 누구냐?’며 다그치는 제목이라면 ‘소희 다음’ 정도면 될 텐데. 이상하다, ‘다음 소희’라니.

흔히 ‘다음’ 뒤에 오는 명사는 ‘다음 기회, 다음 정류장, 다음 사람, 다음 생’처럼 일반명사들이다. ‘다음 기회’는 지금과 다른 계기를 맞이할 듯하고, ‘다음 정류장’에서는 다른 풍경이 펼쳐지겠지. ‘다음 피해자’라면 다른 인물이 다른 사건을 비극적으로 만날 것이다.

그런데 ‘다음’ 뒤에 ‘소희’라는 고유명사를 박아 넣었다. 이렇게 되니 빈틈이 생기지 않는다. 개별성이 사라졌다. 회로 변경의 가능성을 끊고 마개를 닫아버렸다. ‘당신 = 다음 소희’. ‘소희 다음’은 당신이 아닐 수도 있지만, ‘다음 소희’는 반드시 당신이라고 들린다. 당신이나 나나 모두 소희다. 버둥거려봤자 소용없다. 다음도 소희, 그다음도 다시 소희. 무한 반복하고 무한 회귀하는 소희. 구제불능 사회의 절망감을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새로운 문법으로 표현하다니.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56866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03325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18272
3304 용찬 샘, 용찬 씨 風文 2023.04.26 1365
3303 매뉴얼 / 동통 風文 2020.05.30 1366
3302 다만, 다만, 다만, 뒷담화 風文 2022.09.07 1366
3301 국가 사전을 다시?(2,3) 주인장 2022.10.21 1366
3300 법과 도덕 風文 2022.01.25 1367
3299 사저와 자택 風文 2022.01.30 1367
3298 말하는 입 風文 2023.01.03 1369
3297 내일러 風文 2024.01.03 1369
3296 금새 / 금세 風文 2023.10.08 1370
3295 남과 북의 언어, 뉘앙스 차이 風文 2022.06.10 1371
3294 발음의 변화, 망언과 대응 風文 2022.02.24 1373
3293 말의 바깥, 말의 아나키즘 風文 2022.08.28 1373
3292 말과 절제, 방향과 방위 風文 2022.07.06 1375
3291 가짜와 인공 風文 2023.12.18 1376
3290 정당의 이름 風文 2022.01.26 1378
3289 영어 열등감, 몸에 닿는 단위 風文 2022.04.27 1378
3288 비계획적 방출, 주접 댓글 風文 2022.09.08 1378
3287 피동형을 즐기라 風文 2023.11.11 1381
3286 거짓말과 개소리, 혼잣말의 비밀 風文 2022.11.30 1382
3285 일본이 한글 통일?, 타인을 중심에 風文 2022.07.22 1383
3284 장녀, 외딸, 고명딸 風文 2023.12.21 1384
3283 주시경, 대칭적 소통 風文 2022.06.29 1386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