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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척거리다

보통은 장애인을 향해 ‘당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냐?’고 묻는다. 장애학자 마이클 올리버는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라고 제안한다. 장애는 개인이 아닌, 사회의 문제라는 걸 알게 하는 질문이다.

10월19일 문화체육관광위 국정감사 자리. 며칠 전 정무위에서 국회의원 윤창현씨가 쓴 ‘질척거린다’는 표현에 국민권익위원장 전현희씨는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했다. 이 말에 의문을 품게 된 국회의원 배현진씨는 국감장에서 국립국어원장 장소원씨를 불러 세웠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진흙이나 반죽 따위가 물기가 매우 많아 차지고 진 느낌이 자꾸 들다’라고 풀이되어 있는데, ‘이 이상의 사전적 의미가 있냐?’고 묻더라. 사전에 그런 뜻이 없으니 국가사전을 옹위해야 하는 국어원장 입장에선 당연히 ‘없다’고 하더군.

사전이 뭐라 하든, 말은 쉼 없이 움직인다. 누구의 승인도 필요 없다. 이미 인터넷엔 ‘질척거리는 남자나 여자’를 싫어한다는 글이 수북하다. 비슷한 뜻의 ‘질퍽거린다’는 말도 진흙이나 반죽 말고 사람에게도 쓰인다. 엄마를 좋아하는 우리 딸은 외출하면서 한 번이면 될 인사를 아쉬운 듯 몇 번씩 되풀이한다. ‘그만 질척거리고 어서 가’라는 핀잔을 듣고서야 새초롬해져서 간다. 나도 가끔 아내에게 귀찮게 굴어 이 소리를 듣는다. 

달리 물었어야 했다. “왜 진흙이나 반죽의 상태를 뜻하는 말을 ‘사람’에게 썼을까?” 혹은 “이 말을 사람에게 쓰면 어떤 뜻을 갖게 되나?”. 그랬다면 국어원장도 단답형이 아닌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그 말이 획득한 의미에 대해 자신의 식견을 펼쳤을 텐데. 나는 ‘질척거린다’는 말을 들으면 수치스럽다.


마약 김밥

‘똥통 학교’란 말을 아시리라. 어느 학교가 똥통 학교라며 여기서 쑤군, 저기서 쏙닥거린다. 취사선택의 폭을 넓힌다는 고교 다양화 정책으로 특목고, 자사고, 특성화고, 일반고로 나뉜 학교는 더욱 서열화했다. 묘책이 있다. ‘똥통’이란 말이 학생들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고 서열화를 강화하기 때문에 앞으로 ‘똥통’이란 말을 쓰지 못하게 하는 건 어떤가?

‘벼락부자’란 말을 자꾸 쓰면 벼락에 대한 ‘겁대가리’를 상실하여 ‘진짜 벼락’을 맞겠다며 먹구름을 쫓아다니는 부자들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도처에서 행해지는 ‘폭탄 세일’과 ‘총알 배송’은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약화해 최근의 한반도 긴장 고조의 심리적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얼마 전, 식품 이름에 마약 등의 표현을 넣지 못하게 하는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다. 매일 먹는 음식에 ‘마약’을 쓰면, 사람들(특히, 사리분별 못 하는 청소년들)이 마약에 대한 경각심을 잃고 쉽게 진짜 마약에 손을 댈지 모른다는 주장이 먹혔다. ‘중독될 만큼 맛있다’는 비유적 뜻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마약을 기호식품이나 식품첨가제로 인식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외국에서는 인터넷에 마약이란 단어를 노출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니, 우리 사회는 그간 너무 헐렁했어! ‘마약 김밥’이여, 이젠 안녕.

말은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세상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한다. 하지만 이렇게 직선적이고 단순하지는 않다. ‘마약 김밥’을 못 쓰게 한다고 마약 사범이 줄어들진 않는다. 세상이 져야 할 책임을 말에 떠넘기지 말라.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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