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11.22 06:36

열쇳말, 다섯 살까지

조회 수 1308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다섯 살까지

“이게 뭐야?” 어린아이가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이자, 삶에서 가장 놀라운 발견의 시기를 겪고 있음을 보여주는 질문이다. 즉,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이 있다는 것. 이 이름(명칭)은 어른들이 생각하듯 대상의 본질과 관계없는 자의적 ‘기호’가 아니다. 아이에게 ‘이름’은 처음부터 대상이 갖고 있던 특성이다. 마치 빨간 껍질 속에 하얗고 단단한 과육이 들어 있고 아삭아삭 씹히며 새콤달콤한 맛을 내는 것이 사과의 특성이듯이, ‘사과’라는 이름도 그 대상의 본래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끝없이 묻는다. ‘이게 뭐야?’

네댓 살이 되면 질문이 바뀐다. ‘엄마는 왜 나보다 나이가 많아? 나무는 왜 흔들려? 해는 왜 저녁엔 안 보여?’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의 기원이나 존재 이유, 질서에 대한 온갖 기상천외한 가설을 세우고 막힘없이 묻는다.

여기가 인간이 동물과 갈라지는 지점이다. 배고픔, 아픔, 공포, 기쁨을 나타내는 자기표현이나 상대방에 대한 경고, 위협, 허용과 같은 신호 행위는 동물에게도 보인다. 하지만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이름으로 사물을 대신하는 사유능력은 인간에게만 나타난다. 하지만 다섯 살 아이는 세계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 세워나가는 게 아니다. 그가 딛고 선 사회, 역사, 문화라는 발판 위에 성립한다(비고츠키, <생각과 말>).

그러다 보니, 문득 의문 하나가 남는다. 만 5살 입학은 ‘과도한 경쟁과 선행 학습, 사교육’에 어린아이들을 몰아넣는 일이다. 이런 반교육적 학교는 여섯 살부터는 견디거나 허용될 만한 곳인가? 학교는 이 세계에 다가가는 배움의 공간은 될 수 없는가?


열쇳말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지인이 조심스레 말한다. “밤새 누가 벽을 두드리더라.” 별일 없는 이 동네에 그럴 리 없는데 이상하다. 가만히 들어보니 벽시계가 내는 소리였다. ‘틱, 틱, 틱’ 하는 저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지냈다. 뭔가를 알아채는 감각은 한곳에 얼마나 눌러앉아 있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섬세함은 이방인의 전유물. 안주하는 자에게선 찾을 수 없다.

‘열쇳말’은 한 사회의 문화나 역사를 이해하는 핵심 개념이다. 외신에 다시 등장한 ‘banjiha’(반지하)란 말은 한국의 사회적 격차와 주거 형태의 문제점을 단박에 꿰뚫는 열쇳말이리라. ‘반지하’에 쓰인 접두사 ‘반(半)-’은 ‘절반’이란 뜻도 있지만, ‘~와 거의 비슷한’이란 뜻도 있다. ‘반나체’는 절반만 벗은 게 아니라, 거의 다 벗은 상태. ‘반죽음’도 거의 죽게 된 상태이다. ‘반지하’도 ‘절반이 지하’인 집이 아니다. 지하실과 다름없는 집. 끽해야 아침 한때 등이 굽은 햇빛이 지나치는 집이다.

나의 20대 딸은 밥상에 김이 없어도 울고, 있어도 운다. 밥을 아귀차게 잘 먹다가도 눈물을 뚝뚝 흘린다. 내년 봄, 일본이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면 얼마 못 가 이 ‘김’을 못 먹게 되지 않냐고. 그러고 보니 일본 시민단체와 교류하는 선생한테 ‘안전한 한국산 다시마 좀 보내달라는 연락이 일본에서 온다’는 얘기도 들었다. 딸에게 ‘김’은 우리의 파국적 상황을 예견하는 열쇳말이다.

나는 이 세계의 아픔과 모순을 어떤 열쇳말로 알아채고 있을까. 쩌렁쩌렁 울리는 저 시곗바늘 소리도 못 알아채는 이 무감각함으로….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1. No Image notice by 바람의종 2006/09/16 by 바람의종
    Views 42928 

    ∥…………………………………………………………………… 목록

  2.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3. No Image notice by 風磬 2006/09/09 by 風磬
    Views 204561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4. No Image 01Jun
    by 風文
    2020/06/01 by 風文
    Views 1232 

    깻잎 / 기림비 1

  5. No Image 03Aug
    by 風文
    2022/08/03 by 風文
    Views 1232 

    괄호, 소리 없는, 반격의 꿔바로우

  6. No Image 24May
    by 風文
    2020/05/24 by 風文
    Views 1237 

    경텃절몽구리아들 / 모이

  7. No Image 30May
    by 風文
    2020/05/30 by 風文
    Views 1240 

    매뉴얼 / 동통

  8. No Image 24Nov
    by 風文
    2023/11/24 by 風文
    Views 1241 

    ‘개덥다’고?

  9. No Image 02Aug
    by 風文
    2022/08/02 by 風文
    Views 1242 

    비는 오는 게 맞나, 현타

  10. No Image 15May
    by 風文
    2020/05/15 by 風文
    Views 1243 

    선정-지정 / 얼룩빼기 황소

  11. No Image 13Oct
    by 風文
    2023/10/13 by 風文
    Views 1244 

    ‘걸다’, 약속하는 말 / ‘존버’와 신문

  12. No Image 03Sep
    by 風文
    2022/09/03 by 風文
    Views 1253 

    국가 사전 폐기론, 고유한 일반명사

  13. No Image 01Nov
    by 風文
    2023/11/01 by 風文
    Views 1253 

    ‘괴담’ 되돌려주기

  14. No Image 02Nov
    by 風文
    2021/11/02 by 風文
    Views 1263 

    방언의 힘

  15. No Image 25Apr
    by 風文
    2023/04/25 by 風文
    Views 1269 

    개양귀비

  16. No Image 21Aug
    by 風文
    2022/08/21 by 風文
    Views 1270 

    ‘사흘’ 사태, 그래서 어쩌라고

  17. No Image 06Jun
    by 風文
    2023/06/06 by 風文
    Views 1270 

    이 자리를 빌려

  18. No Image 15Sep
    by 風文
    2022/09/15 by 風文
    Views 1276 

    4·3과 제주어, 허버허버

  19. No Image 28May
    by 風文
    2023/05/28 by 風文
    Views 1276 

    아이 위시 아파트

  20. No Image 31Oct
    by 風文
    2021/10/31 by 風文
    Views 1281 

    외부인과 내부인

  21. No Image 26May
    by 風文
    2020/05/26 by 風文
    Views 1285 

    좋은 목소리 / 좋은 발음

  22. No Image 24Apr
    by 風文
    2023/04/24 by 風文
    Views 1287 

    너무

  23. No Image 23Sep
    by 風文
    2022/09/23 by 風文
    Views 1288 

    울타리 표현, 끝없는 말

  24. No Image 28Oct
    by 風文
    2022/10/28 by 風文
    Views 1288 

    환멸은 나의 힘 / 영어는 멋있다?

  25. No Image 06Feb
    by 風文
    2023/02/06 by 風文
    Views 1291 

    국가의 목소리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