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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막의 질주

말귀가 어두워졌다. 귀를 파도 잘 안 들린다. 세상은 더 시시껄렁해졌으니 뭔 대수겠냐마는, 잘 못 알아들으니 눈치도 없고 괜스레 넘겨짚었다가 핀잔 듣기 일쑤다. 자막 없이 드라마도 보기 어렵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내 눈은 자막에 박혀 있다.(영화는 읽는 것!) 비빌 언덕이 있으니 청력은 더 떨어진다.

자막의 변신은 눈이 부시다. 화면 하단에 얌전히 자리 잡은 채 누군가의 발언을 받아 적는 걸로 만족하지 않는다. 책처럼 닝닝하지 않고 형형색색 화려하고 고혹적이다. 이제 방송은 영상과 소리와 자막의 삼중주. 날렵하고 쌈박하게 자막을 ‘입힌’ 프로그램은 인기도 좋다. 자막 없이 생목소리만 오가는 프로를 무슨 재미로 볼꼬.

자막은 포스트모던하기까지 하다. 화면 어디든 자유롭게 떠다니면서, 중심 발언자와 주변 발언자를 뒤섞어 여러 목소리가 함께 아우성치도록 한다. 출연진뿐만 아니라 화면 밖의 목소리(제작진이나 시청자)까지 끌어들인다. 지금 벌어지는 장면과 전혀 무관한 정보를 자막으로 끌어와 강제로 포개놓는다. 게다가 출연자의 행동만을 보고 머리맡에 ‘부끄, 움찔, 빠직, 끄응, 답답, 솔깃’ 따위의 말을 얹어놓아 그의 심리 상태마저 알려준다. 마음까지 읽어주다니 자막은 독심술사.

연출가는 영상만으로도 이 세계를 편집하고 해석한다. 자막은 그의 해석이 유일무이하다는 것을 승인하는 서명이다. 우리는 연출가가 다그치는 감각의 외길을 따라가야 한다. 틈을 주지 않고 촘촘하게 짜인 그 길은 엉뚱한 상상이나 딴생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상상력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듯.


당선자 대 당선인

헌법에 ‘대통령 당선자’라 분명히 나오는데도, 대통령직인수법에는 ‘대통령 당선인’이라면서 따로 뜻풀이까지 해놓았다. 인사청문회법도 그렇고, 공직선거법엔 아예 ‘당선인’이라는 장이 따로 있더군. 선관위에서 주는 당선증에도 다 ‘당선인’이라 적혀 있다. 이러니 논쟁적일 수밖에. 지금은 성향과 무관하게 ‘당선인’이 대세다. <한겨레>만이 근성 있게 ‘당선자’를 쓸 뿐.

나에겐 ‘당선자’가 비판적 거리감 비슷한 느낌을 주는데, 실은 지난날부터 입에 눌어붙은 말이라 좋아하는 거겠지. 그런데 이명박씨가 집권하면서 ‘당선인’이라 써달라면서 논란이 됐다. 헌재에서 헌법대로 ‘당선자’로 쓰라고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선자’는 표를 많이 얻은 사람을 지칭할 뿐, 호칭으로는 ‘당선인’이라는 것. ‘자’(者)가 ‘놈 자’라 ‘대통령에 당선된 놈’이란 뜻이니 이 얼마나 불경한가.

그러나 접미사 ‘-자’에는 비하의 뜻이 없다. ‘실패자’가 비하라면 ‘승리자’도 비하일까. ‘배신자, 탈락자, 기회주의자, 성격파탄자’가 비하라면, ‘과학자, 보호자, 노동자, 유권자, 구원자’는 어쩔 텐가. 전체 낱말에 대한 사회적 평가에 따라 어감의 차이가 생길 뿐. 권력‘자’와 기‘자’, 언론‘인’이 세상 휘젓기 놀이 도구로 써서 그렇지, 말에 무슨 잘못이 있으리오.

‘당선자’라 쓴다고 정론직필의 기사를, ‘당선인’이라 쓴다고 곡학아세의 기사를 쓴다고 보지 않는다. 그저 이 허망한 논란으로 가려지는 이웃들의 삶이 안타까울 뿐이다. 민중의 이익에 복무하는 자이기만 하다면야, ‘당선인 각하’도 아깝지 않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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