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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

나는 말에 잘 속아 넘어가는 편이다. 가게 채소 칸에 ‘밤고구마’라 적혀 있으면 분명 당근인데도 ‘햐, 밤고구마가 발그스레한 게 맛있어 보이는군’ 하고 속는다. 어제는 아들이 가으내 해바라기씨를 말려 투명 비닐봉지에 넣어 왔는데 하필 겉에 ‘취나물말림’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걸 보고, ‘말린 취나물이 씨앗처럼 생겼군’ 하며 얼토당토않은 추측을 했더랬다.

말에 속아 판단을 그르치는 것보다 나를 더 좌우하는 건 선입견이다. 선입견은 머리보다는 몸의 기억에 가깝다. 아버지는 각자가 경험한 아버지다. 같은 쥐래도 들쥐는 등골이 오싹해지고 다람쥐는 웃음이 나온다. 바퀴벌레는 4억년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과학자들에겐 관심의 대상일지 모르지만 우리에겐 ‘해충’이다. 기독교도들은 기도 중에 (부처가 아닌) 예수를 만나고, 불교도들은 (예수가 아닌) 부처를 만난다. 깊고 깊은 심층에도 선입견이 작용하나 보다.

구름이 사라지면 달이 선명해지듯이, 선입견을 없애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선입견을 없앨 수 없다. 우리는 언제나 선입견을 가지고 어떤 것을 이해한다(가다머). 선입견은 인간이 세계를 알아가는 방법이다. 개인의 삶의 역사가 쌓여 선입견을 만들고, 이 선입견을 바탕으로 현재를 이해한다. 사회 전체가 공통으로 쌓아올린 선입견을 ‘상식’이라고도 하고 ‘공통기억’, ‘공통감각’, ‘역사’라고도 한다.

투표는 우리의 선입견에 대한 관찰보고서다. 진정한 정치의식은 자신의 선입견을 자각하고 재음미하는 데에서 길러진다. 나는 이 땅의 뭇 생명들과 어떤 삶의 인연을 맺어왔던가를.


부동층이 부럽다

확신이 안 선다. 사무실 온풍기 불을 껐는지, 안 껐는지. 이미 버스는 탔고, 돌아갔다 오면 약속 시간엔 늦는다. 끈 거 같기도 하다. 종일 틀어놔도 별 탈 없었고. 하지만 ‘만에 하나’ 불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버스에서 내린다. 돌아가지 않으면 내내 걱정일 테고, 갔는데 불이 꺼져 있으면 허탈하겠지. 되돌아간 보람이라도 있으려면, 차라리 불이 켜져 있기를!

선거는 사람들 마음에 심리적 확고함이라는 굳은살이 자라게 한다. 일종의 최면 상태이다. 평소보다 접하는 정보는 더 편향적이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확신에 차 있다. 나는 언제나 정의와 진리의 편. 무너진 정의를 세우고 시대정신을 구현하려면 ‘그’가 되어야 하고, ‘그놈’은 반드시 떨어뜨려야 한다. 지지 후보와 정서적 일체감과 사상적 동질감을 느낀다. 확고함은 간절함과 친구 사이. 고약하게도 간절할수록 불안감도 커진다. 혹시 ‘그놈’이 당선되면 세상은 엉망진창, 뒷걸음질하겠지.

투표를 하면서 ‘안 되면 어떡하지?’보다 ‘내가 틀렸을지도 몰라’라는 말을 되뇐다. 우리가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되뇌다 보면 정치를 둘러싼 말이 쪽수나 당락의 문제로 귀결되지 않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이 세계를 명징하게 설명하거나 해결할 수 없다. 나는 정의의 편이 아닐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부동층’이 부럽다. 흔들리는, 한곳에 정박하지 않는,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오늘과 내일의 생각이 같지 않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정치는 생활현실에 더 가까워지고, 사회는 더 두툼해지리라. 분하게도 나는 부동층이 되기엔 이미 머리가 굳었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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