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2022.10.08 12:18

풀어쓰기, 오촌 아재

조회 수 95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오촌 아재

옛 시골에선 겨울에 산문이 열린다. 이웃들이 함께 산에 올라 땔감을 한다. 하지만 어찌 한날한시에 다 모일 수 있으랴. 노가다판에 가 있기도 하고 낫질하다 손가락이 상해 못 나오기도 하지. 으스름 저녁 이고지고 온 나무를 마당에 부리고 나면, 분배가 문제. 식구 수에 따라 나누자니 저 집은 한 사람밖에 안 나왔다고 투덜. 똑같이 나누자니 저 집 나무는 짱짱한데, 내 건 다 썩어 호로록 타버리겠다고 씨부렁.

거기에 오촌 아재 등장. ‘오촌’은 ‘적당한 거리감’의 상징. 막걸리잔 부딪치며 ‘행님 나무가 짱짱하니 고 정도로 참으쇼.’ ‘저 동상네 아부지가 션찮으니 몸이라도 지지게 좀 더 줍시다.’ 한다.

다툼은 쪼잔한 데서 시작된다. 우리 동네에서도 마을정원 일을 해야 했다. 방역조치 때문에 화요일과 금요일 반으로 나눠 일을 했다. 마치고 점심을 먹자니 화요일 반에선 밥 먹는 데 돈 쓰지 말라며 사양, 금요일 반은 일 마치고 차 타고 퇴비 사러 갔다 오다 늦은 점심을 먹은 게 탈이었다. 누군 사주고 누군 안 사주었네, 친한 사람들끼리 먹었네 하며 마을 여론이 두 갈래로 쩍 갈라졌다.

자율적 공동체가 역동성을 갖추려면 적어도 네 가지 유형의 인물이 필요하다(가타리, <미시정치>). 어린이(미래), 국가(외부 자원), 이웃 주민(동료), 그리고 대안적 인물(상상). 그는 자유의 공간을 창조하는 인물이자 당면한 사태 너머를 보는 사람이다. 험담이 퍼져나가지 않게 움직이며 활로를 찾아낸다. 그의 가장 큰 역할은 ‘말’을 건사하는 일이다. 어디든 오촌 아재 같은 사람이 있으면 흥하고, 없으면 졸한다.


풀어쓰기

영어처럼 한국어도 옆으로 풀어쓰면 어떨까. 낯설겠지만 아래 시를 읽어보자.

ㅈㅜㄱㄴㅡㄴ ㄴㅏㄹㄲㅏㅈㅣ ㅎㅏㄴㅡㄹㅇㅡㄹ ㅇㅜㄹㅓㄹㅓ
ㅎㅏㄴ ㅈㅓㅁ ㅂㅜㄲㅡㄹㅓㅁㅇㅣ ㅇㅓㅄㄱㅣㄹㅡㄹ (윤동주, ‘서시’).

나는 지금도 지인들한테 보내는 이메일에 ‘ㄱㅣㅁㅈㅣㄴㅎㅐ’라 쓰곤 한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음소문자인 한글의 또 다른 표기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풀어쓰면 좋은 점이 있다. 영어 필기체처럼 글씨를 더 빨리 쓸 수 있고, 컴퓨터 글자체(폰트) 개발에도 시간을 ‘엄청’ 줄일 수 있다. ‘걎, 걞, 겏’이나 ‘뷁’처럼, 한글로 만들 수 있는 음절수는 무려 1만1172자이다.(한자에 이어 세계 2위!) 이 중에서 흔히 쓰는 음절 2350자는 반드시 디자인을 해야 한다. ‘ㅇ아안않우울오올의궁굉’에 쓰인 ‘ㅇ’이 다 다르게 생겼으니 말이다. 풀어쓰기를 하면 ‘ㅇ’을 하나만 디자인하면 된다. 폰트 디자이너도 저녁 있는 삶이 가능해진다.

주시경을 시작으로 그의 제자 최현배(남), 김두봉(북)이 풀어쓰기를 주도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의 꿈이기도 했다. 이들에게 문자 개혁의 종착지는 풀어쓰기였다. 문익환 목사도 감옥에 있으면서 풀어쓰기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쓰지 않는다. 익숙한 모아쓰기에 정통성을 부여한다. 현실이 궁극의 합리성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결여나 불합리로 보지 않는다. 못 미치면 못 미치는 대로 그 속에서 이치를 찾고 습관을 들인다. 문화는 논리보다는 습관에 가깝다. 사람의 발자국이 쌓여 길이 만들어지면 꼬부랑길일지라도 그게 가장 편하고 자연스럽다.


  1. No Image notice by 바람의종 2006/09/16 by 바람의종
    Views 39266 

    ∥…………………………………………………………………… 목록

  2.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3. No Image notice by 風磬 2006/09/09 by 風磬
    Views 200712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4. No Image 26Jun
    by 風文
    2022/06/26 by 風文
    Views 861 

    물타기 어휘, 개념 경쟁

  5. No Image 19Apr
    by 風文
    2023/04/19 by 風文
    Views 861 

    내연녀와 동거인

  6. No Image 20Jun
    by 風文
    2022/06/20 by 風文
    Views 862 

    혁신의 의미, 말과 폭력

  7. No Image 07Jan
    by 風文
    2022/01/07 by 風文
    Views 864 

    일고의 가치

  8. No Image 24Feb
    by 風文
    2022/02/24 by 風文
    Views 864 

    발음의 변화, 망언과 대응

  9. No Image 14Jun
    by 風文
    2022/06/14 by 風文
    Views 864 

    동무 생각, 마실 외교

  10. No Image 28Oct
    by 風文
    2021/10/28 by 風文
    Views 865 

    언어와 인권

  11. No Image 27Jun
    by 風文
    2022/06/27 by 風文
    Views 866 

    뒷담화 보도, 교각살우

  12. No Image 16Nov
    by 風文
    2023/11/16 by 風文
    Views 867 

    쓰봉

  13. No Image 17Feb
    by 風文
    2024/02/17 by 風文
    Views 868 

    내 청춘에게?

  14. No Image 25Jan
    by 風文
    2022/01/25 by 風文
    Views 870 

    연말용 상투어

  15. No Image 21Jun
    by 風文
    2022/06/21 by 風文
    Views 870 

    말과 서열, 세대차와 언어감각

  16. No Image 06May
    by 風文
    2022/05/06 by 風文
    Views 871 

    외국어 차용

  17. No Image 18Jun
    by 風文
    2022/06/18 by 風文
    Views 872 

    새로운 한자어, 이름과 실천

  18. No Image 21Sep
    by 風文
    2022/09/21 by 風文
    Views 872 

    어떤 청탁, ‘공정’의 언어학

  19. No Image 20May
    by 風文
    2022/05/20 by 風文
    Views 873 

    말과 상거래

  20. No Image 11Nov
    by 風文
    2023/11/11 by 風文
    Views 875 

    피동형을 즐기라

  21. No Image 21Jul
    by 風文
    2022/07/21 by 風文
    Views 877 

    3인칭은 없다, 문자와 일본정신

  22. No Image 06Jan
    by 風文
    2024/01/06 by 風文
    Views 878 

    사라져 가는 한글 간판

  23. No Image 11May
    by 風文
    2022/05/11 by 風文
    Views 879 

    세계어 배우기

  24. No Image 11Oct
    by 風文
    2023/10/11 by 風文
    Views 880 

    모호하다 / 금쪽이

  25. No Image 21Nov
    by 風文
    2023/11/21 by 風文
    Views 880 

    군색한, 궁색한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56 Next
/ 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