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1736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맞춤법을 없애자

그동안 어문 규범은 근대 국가 성립 과정에서 말과 글에 일정한 질서와 공통성을 부여해주었다. 이제 그 역할을 다했으니 놓아주자. 근대의 성과를 디딤돌 삼아 한 단계 올라서려면, 성문화된 맞춤법, 표준어 규정을 없애야 한다.

어문 규범을 없앤다고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어문 규범은 이미 뿌리내렸다. 올바르게 철자를 쓰라는 요구는 이제 문명인의 ‘최소’ 기준이자 사회적 장치다. 학교 교육, 다양한 미디어 환경, 공공언어 영역은 언어의 공통성을 유지하는 버팀목이다.

좋은 점은 많다. 우리는 늘 판결을 기다린다. “‘어쭙잖다’는 맞고 ‘어줍잖다’는 틀린다”는 식. 반면, 영어에서 ‘요구르트’를 ‘yogurt’, ‘yoghurt’, ‘yoghourt’로 쓰지만 큰 문제가 안 된다. 어문 규범을 없애면 다양한 철자가 공존하게 된다. ‘마르크스’와 ‘맑스’, ‘도스토옙스키’와 ‘도스또예프스끼’를 보고 ‘이렇게도 쓰나 보군’ 하며 넘어갈 수 있다. 사회적 분노 지수를 낮추고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이 생긴다.

불문율이 언어의 본질에 맞는다. 말에는 사회성과 함께 역사성이 뒤엉켜 있다. 그래서 늘 애매하다. 강조점에 따라, ‘닦달’을 쓸 수도, ‘닥달’을 쓸 수도 있다. 말에 대한 의견 불일치의 유지와 공존이야말로 말에 대한 상상력을 촉발한다. 야구에서 ‘9회에 10점 이상 이기고 있는 팀은 도루를 하지 않는다’고 법으로 정해놓았다면 얼마나 재미없나. 성문법을 없애야 지역, 사람, 시대에 대한 관심이 살아난다. 말의 민주화와 사회적 역량 강화는 성문법의 폐지에서 시작된다. 꿈같은 얘기다.



맞춤법을 없애자 2

성문화된 맞춤법을 없애자고 했더니 말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았다. 구구단을 다 외웠으면 벽에 붙여놓은 구구단표를 떼어내야 한다. 현대적 말글살이를 위해 한걸음만 내딛자.

성문화된 규범이 없어도 표기의 질서는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다. 성문법이 없는 절대다수 국가가 이를 보여준다. 한글 맞춤법은 공통어의 형성이라는 근대 민족국가 건설의 과제와 일본 제국주의의 언어말살 정책에 맞서 민족 정체성의 확립이라는 과제가 겹친 시기에 제정되었다. 변변한 사전도 없고 합의된 표기 방법도 없던 상황에서 이룬 커다란 성취다.

현행 맞춤법의 대원칙은 ‘(1)표준어를 (2)소리대로 적되 (3)어법에 맞도록’ 쓴다는 것이다.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이라는 원칙은 상황에 따라 달리 적용되어 우리를 괴롭히지만, 다른 표기 방안보다 여러모로 낫다. ‘갓흔’(같은), ‘바닷다’(받았다)처럼 소리 나는 대로 적자던 조선총독부의 ‘언문철자법’(1912)이나 이승만의 ‘한글 간소화 방안’(1954)에 비하면 한국어의 특성을 합리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그 결과 맞춤법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독보적 원리로 정착되었다. 문화적 무의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공적 영역을 유지하기 위한 실천적 습관(아비투스)이 되었다. 다음 세대에서도 유지될 것이다. 즉, 역사성과 정당성을 확보했다. 그러니 겁내지 말자. ‘꼿밧에 안자 잇는 옵바’(꽃밭에 앉아 있는 오빠)라 쓴 책이 팔리겠는가.

문제는 ‘표준어’다. 맞춤법을 없애자는 주장은 결국 ‘표준어’를 없애자는 것이다.(다음 주에 이어서)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 목록 바람의종 2006.09.16 64817
공지 새 한글 맞춤법 표준어 일람표 file 바람의종 2007.02.18 211429
공지 간추린 국어사 연대표 風磬 2006.09.09 226140
180 ‘뛰다’와 ‘달리다’ 바람의종 2007.11.05 5963
179 ‘때식을 번지다’와 ‘재구를 치다’ 바람의종 2010.05.07 13473
178 ‘돌미’와 ‘살미’ 바람의종 2008.02.01 8381
177 ‘도와센터’ ‘몰던카’ 風文 2024.01.16 2439
176 ‘대틀’과 ‘손세’ 바람의종 2010.05.28 13906
175 ‘당신의 무관심이 …’ 바람의종 2008.04.02 6661
174 ‘달 건너 소식’과 ‘마세’ 바람의종 2010.05.31 10882
173 ‘다음 소희’에 숨은 문법 風文 2023.02.27 1680
172 ‘넓다´와 ‘밟다´의 발음 바람의종 2010.08.15 22892
171 ‘내 부인’이 돼 달라고? 風文 2023.11.01 1563
170 ‘나이’라는 숫자, 친정 언어 風文 2022.07.07 1732
169 ‘끄물끄물’ ‘꾸물꾸물’ 風文 2024.02.21 2415
168 ‘꾹돈’과 ‘모대기다’ 바람의종 2010.05.09 13635
167 ‘김치’와 ‘지’ 바람의종 2007.09.22 7172
166 ‘긴장’과 ‘비난수’ 바람의종 2010.03.30 18109
165 ‘기쁘다’와 ‘즐겁다’ 바람의종 2007.09.29 12872
164 ‘그러지 좀 마라’ 바람의종 2010.02.07 7959
163 ‘괴담’ 되돌려주기 風文 2023.11.01 1960
162 ‘곧은밸’과 ‘면비교육’ 바람의종 2010.04.26 10440
161 ‘고마미지’와 ‘강진’ 바람의종 2008.04.08 8483
160 ‘경우’ 덜쓰기/최인호 바람의종 2007.04.25 7208
159 ‘걸다’, 약속하는 말 / ‘존버’와 신문 風文 2023.10.13 187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42 143 144 145 146 147 148 149 150 151 152 153 154 155 156 157 Next
/ 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