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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말 찾기

단어가 잘 안 떠오른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요즘엔 더 잦아졌다. 뇌 기능이 조금씩 뒷걸음질친다. 수업 때 수십 종의 개 이름을 다다닥 읊어주고 그걸 그저 ‘개’라고만 하는 말의 폭력성을 보여줌으로써 학생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그 순간 떠오른 말은 ‘발바리’밖에 없었다. ‘풍산개, 삽살개, 셰퍼드, 불도그, 푸들, 닥스훈트’, 하다못해 ‘진돗개’는 어디로 갔나.

그래도 말에 장애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면 좋은 점이 있다. 허공에 빈손 휘젓듯 머릿속을 뒤적거리다 보면 상실된 것 주변에 아직 상실되지 않은 나머지들이 날파리처럼 몰려드는 걸 보게 된다. 머릿속 낱말들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짐작할 수도 있다.

흔히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딴 말로 풀어 말한다. 일종의 번역인데 ‘칼’이란 낱말이 떠오르지 않아 ‘뾰족하게 생겨 뭘 자르는 거!’라는 식이다. 비스름한 말만 맴돌기도 한다. ‘강박’이란 말이 안 떠올라 ‘신경질, 편집증, 집착’이, ‘환멸’ 대신에 ‘혐오, 넌덜머리, 염증’이란 말만 서성거린다. 비슷한 소리의 단어가 어른거리기도 한다. ‘속물’이란 단어가 안 떠올라 첫 글자가 ‘ㅅ’인 ‘사람, 선물, 사탄, 사기’란 말이 움찔거리다가 이내 사라진다. 혼자 하는 말잇기놀이 같다.

부부의 대화 중 잃어버린 말을 찾으려 스무고개를 하는 경우가 심심찮다. 상실된 말 주변에 더 이상 아무 말도 모이지 않으면, ‘그때 걔, 있잖아 걔’, ‘아, 거 그거, 뭐시기냐 그거’ 이렇게 될 거다. 침묵으로 빠져들기 전, 마지막까지 내 혀에 살아남을 말이 뭘지 궁금하다. 부디 욕이 아니길.



‘영끌’과 ‘갈아넣다’

말에는 허풍이 가득하고 인간은 누구나 허풍쟁이이다. 보고 들은 걸 몇 곱절 뻥튀기하고 자기 일은 더 부풀린다. ‘아주 좋다, 엄청 많다’고 하면 평소보다 더한 정도를 표현한다. 하지만 ‘아주, 엄청, 매우, 무척, 너무’ 같은 말은 밋밋하고 재미가 없다. 더 감각적인 표현들이 있다.

이를테면 ‘뼈 빠지게 일하다, 등골이 휘도록 일하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다, 목이 터져라 외치다, 죽어라 하고 도와주다, 쎄(혀) 빠지게 고생한다’고 하면 느낌이 팍 온다. 화가 나면 피가 거꾸로 솟고,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살고, 눈 깜짝할 사이에 일이 벌어진다. 상다리가 부러지게 음식을 차리고 문지방이 닳도록 사람이 드나든다. 사진을 보듯 생생하지만 과장이 심하다.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다는 뜻으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다)이나 ‘갈아 넣다’라는 말을 곧잘 듣는다. 장롱 밑에 굴러 들어간 동전까지 탈탈 털어 집을 사거나 투자를 할 수는 있지만, 영혼까지 끌어모으고 갈아 넣어서 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혼을 담은 시공’이라는 건설 광고판을 보며 들었던 두려움과 죽음의 정서와 겹친다.

과장된 말처럼 현실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사람이 많다. 탈진할 때까지 힘을 써야 하고 등골이 휘어져도 참아야 하고 영혼마저 일에 갈아 넣어야 하는 사람들. 매순간 모든 걸 걸어야 하는 사회. 있는 힘을 다해야 할 건 부동산도 일도 아니다. 뼈도 힘도 영혼도 어디다 빼앗기거나 갈아 넣지 말고 고이 모시고 집에 들어가자. 세상이 허풍 떠는 말을 닮아간다. 허풍이 현실에서 벌어지면 십중팔구 비극이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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