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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타기 어휘

물을 탄다는 말은 ‘희석’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희석이란 낱말은 ‘물을 타서 농도를 옅게 한다’는 뜻으로 잘 쓰이고 있지만 ‘물타기’라는 말은 정작 물을 섞어 넣는 일에는 잘 안 쓰이고, 어떤 사안의 심각성을 얼버무리거나 중요한 것을 다른 사소한 문제들과 섞어버리는 것을 비판할 때 많이 쓰인다.

각종 부패 사건이 터지면 ‘무슨무슨 비리사건’과 같은 용어를 쓴다. ‘유치원 비리’ ‘채용 비리’ ‘공무원 비리’ 등에서 사용되는 비리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단순한 말이다. 누구든지 살다 보면 이치에 맞지 않게 실수도, 오해도 하며 지낸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하는 사건들은 그저 이치에 맞지 않는 정도가 아니고 참기 어렵고 분을 억누르지 못할 일이 대부분이다. 분명히 표현하자면 ‘부정한 일’ 아니면 ‘부패사건’인데 이런 것을 단순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물타기’가 아닌가?

예전에는 대개 ‘부정부패, 불법’ 등의 용어가 많이 쓰이다가 슬그머니 ‘부조리’라는 말도 꽤 유행했다. 부정부패라는 말이 나오면 수사 당국이 우물쭈물 시간을 보낼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부조리’라고 하면서 최고 관리자가 “책임을 통감한다”고 하며 고개만 숙이면 슬쩍 넘어가는 경우도 생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모두가 근본적으로는 ‘부패’와 ‘불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거칠고 딱딱한 어휘를 부드러운 말로 고쳐서 순화하는 일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옳지 않은 일, 분노를 살 만한 일에는 ‘공분’을 드러내는 표현이 더 중요하다. 유치원 비리가 아니라 ‘유치원 부정 회계’라든지 채용 비리가 아니라 ‘부정 채용’과 같이 사건의 본질을 명료하게 드러내고 사법 당국도 얼른 대응할 수 있는 분명한 표현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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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경쟁

각종 개념은 특정 대상을 체계적으로 인식하는 언어적인 도구이다. 때로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들이 끊임없이 다투기도 한다. 혹자는 ‘자유시장경제’가 옳다고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사회적으로 통제된 시장이 건강하다고 외친다. 또 누구는 ‘이성애’가 혼인제도의 유일한 규범이어야 한다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제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고도 말한다. 모든 가치와 제도는 개념을 통해 서로 경쟁하고 다툰다.

한때는 ‘화폐’와 ‘현물’이라는 개념이 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다가 결국은 화폐가 승리했다. 화폐가 가진 효율성과 편의성을 현물은 감당할 수 없었다. 일찍이 해양세력의 선두를 달리던 스페인은 신대륙의 은광을 확보하여 떼부자가 되었지만 그저 흥청망청 사치를 부리다가 통화팽창에 주저앉아 버렸다. 조그마한 네덜란드는 ‘신용’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금융과 무역을 크게 일으켰다. 신용제도는 뒤에 영국이 이어받아 세계를 석권하는 계기를 만든다. ‘현금’과 ‘신용’의 싸움에서 신용이 이긴 것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조상도 이미 ‘신용’을 이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제도화하지는 못했다. 자연스레 형성된 신용거래를 그냥 ‘외상’이라고만 하고 변변한 긍정적인 개념으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 일종의 ‘정식 장부 외의 거래’라는 투박한 느낌의 이두를 썼을 뿐이다. 그 정도 개념으로는 ‘신용’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카풀’을 제도화하려는 데 반대가 극심하다. 마치 택시의 경쟁자 혹은 기생 세력처럼 묘사를 하니 당연히 경쟁자가 반대를 한다. 오히려 택시의 보완수단임을 잘 설명했어야 했다. 신용카드의 이름을 ‘외상쪽지’라고 해보자. 아마 사람들이 카드의 사용과 발급을 많이 줄이지 않을까 한다. 언어는 개념을 종종 그럴듯하게 하기도 하지만 종종 없어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김하수/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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