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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화되는 표현들

많고 적음을 알게 하는 ‘양의 세계’는 숫자나 수관형사 그리고 수량단위의 결합으로 나타낸다. 수량단위는 보통사람들이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를 전문적인 단위들도 있지만 반대로 일상생활에서 긴요하게 쓰이는 단위들도 퍽 많다. 가장 흔한 것이 아마 개수를 일컫는 ‘개’일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세는 ‘명’과 ‘사람’, 동물을 세는 ‘마리’, 장소를 세는 ‘군데’, 책을 세는 ‘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언제부터인지 이 수량단위가 점점 단순해지고 있다. 책을 ‘한 개, 두 개’ 하며 세는 것도 퍽 흔해졌고, 식당에서 “맥주 다섯 개요?” 하고 되묻는데 아무도 이상해하는 것 같지가 않다. “쟤네 집에는 차가 세 개나 있대”라는 말도 퍽 흔히 듣는다. 그러다 보니 “잠시만요, 담배 한 개 사올게요”에서의 ‘개’와 “하루에 담배를 스무 개나 피워요?”에서의 ‘개’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고 있다. 수량과 관련된 정보 교환이 점점 성글어지고 있는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못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이와 함께 수량단위와 함께 쓰이는 수관형사 ‘한, 두, 서(석), 너(넉) …’에서도 ‘서(석)’와 ‘너(넉)’를 들어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이미 장년층에서조차 ‘종이 석 장’과 ‘볼펜 넉 자루’를 각각 ‘세 장’과 ‘네 자루’라고 말한다. 볼펜은 아예 ‘네 개’라고 하는 표현이 더 많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해도 그 불편함이나 어색함을 호소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어느새 대세가 되어 버린 느낌이다.

오래된 언어는 장구한 세월 유지해온 정교한 틀이 있다. 거추장스러워 보이면서도 언어의 완결성과 자기다움을 보여주던 장치였다. 삶의 속도와 효율성 추구는 이러한 불필요한 듯하면서도 자기답게 만들어주던 장치와 장식을 용서 없이 팽개치고 있다. 의미와 용법의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 한, 편리함과 간결함을 기준으로 언어의 모습을 거침없이 탈바꿈시키고 있다. 언어도 일회용 소모품이 되어 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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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댓말과 갑질

존댓말은 서로 예절을 지키며 용건을 해결해 나가는 사회적 도구이다. 옛날에는 서로의 지위, 계층, 연배의 차이를 구별하던 말이었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서로 사적이 아닌 공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데 쓰이는 매우 유용한 언어 용법이 되었다. 그래서 나이나 지위가 낮은 사람한테도 존댓말을 씀으로써 오히려 품격을 지키게 되고 공공의 소통을 더욱 객관화하는 훌륭한 언어 교양이라고 할 수 있다.

메르스라는 질병으로 온통 정신이 없는 요즘 어떤 방송에서 다시 한번 언어와 교양 문제를 돌이켜보게 하는 보도가 있었다. 어느 공기업의 직원이 메르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마스크를 벗으라고 요구했고 이에 불응하자 해고했다는 내용이었다. 해고당한 사람은 강력히 항의했지만, 담당 직원은 마스크가 (외국 손님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 있다며 “마스크를 착용하면 통역을 하고 도와드려야 하는데 의사소통이 잘 안되니까 혹시 마스크 착용을 안 해도 (되겠냐) 정중하게 부탁을 드렸거든요”라고 했다고 한다.

이 보도가 정확한 사실에 근거했다면, 여기서 ‘정중하게 부탁’을 드린 말은 분명 존댓말의 형식일 것이다. 권력의 우위를 차지한 사람이 권력이 없는 사람에게 존댓말로 정중하게 ‘부탁’을 한다는 것은 사실 ‘명령’을 내렸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 명령은 함부로 내뱉은 지시보다 더욱더 강력하다. 논리적으로나 감성적으로 저항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지기 때문이다.

존댓말이나 언어의 정중함이 권력의 비대칭과 이에 따른 권력의 일방적 관철을 드러내는 ‘갑질’과 연관될 때는 그 말의 우아함과 품위는 도리어 칼날 같은 흉기가 될 수도 있다. 말을 곱게 가다듬는 일보다 모두의 사회적 관계를 품위 있게 발전시키는 일이 더욱 중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필요한 정당성은 모든 개인을 보호해줄 수 있는 언어적 민주주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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