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야그
2018.03.23 21:03

넋두리

조회 수 4705 추천 수 0 댓글 2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얼마 전? 한 한달 전부터인가 어슬렁거리며 만년필을 주웠다 던졌다 하다가

다시 침대로 들어가 버렸죠.

아마도 뭔가 쓰고 싶었나 봐요.

 

두 번째 여행에서도 종이와 펜은 따라갔지만 단 한 글자도 못 적고 일주일을 돌았죠.

집에 돌아와 짐을 풀며 노트와 펜은 또 그 자리에 던져졌고

다시 침대로 들어가 버렸죠.

아무것도 아무도 그 무엇도 변한 건 없고.......

 

식물들을 씻고 물도 갈고 죽은 놈은 떼 내고

거실도 이 방도 저 방도 청소하고 곰팡이 설은 그릇들도 좀 설거지하고

쓸데없이 냉장고 한번 열었다 닫고 빨래는 내일 하지 뭐. 하고는

다시 침대로 들어가 버렸죠.

 

눈이 옵니다. 아주 많이.

이틀 전 거제도에 있었는데 그 강풍을 몸으로 느껴보니 신선했어요.

비가 따귀 때리듯 때리고 나뭇잎들이 사정없이 날아오고,

심지어 해변을 걷기가 불가능 할 정도였죠.

그 때 저 물에 들어가면 물 밖과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났죠.

밖은 무서워도 물속은 평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났죠.

 

준비했던 이별이 준비하는 사별로 가면

누구 하나는 미쳐가요.

 

시커먼 냉장고를 열고 소주 두 병을 꺼내 오는데 쪽팔리더군요.

오는 길에 욕실 거울과 마주쳤거든요.

저게 나인가. 저 모습이 나였던가.

손에 든 소주병이 파르르 떨립디다.

 

마시고 나니 편해졌어요.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써요.

담배도 맛나고요.

쓰다가 눈물이 나면 침대로 들어가 버리면 되죠.

 

언제쯤 다시 펜을 들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아요.

인간이란

참으로 간사해서

쓰고 싶으면 쓴답니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오늘처럼 추하게

술을 훔쳐오듯

가져와 먹기도 하잖아요.

쓰기 싫어서 안 쓰는 게 아닙니다.

지금은 써봐야 쓰레기라 안 쓰는 게죠.

 

도를 정도로 닦은 자는

나쁜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한 고찰을 하지 않지요.

어느 날 휘리릭 저 침대로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면 끝이겠죠.

더 이상 이 집안을 어슬렁거리는 놈도 없고

시커먼 냉장고에서 훔치듯 소주를 터는 놈도 없고

조용히 먼지 내린 방안을

커튼 사이로 진리라는 빛이 쪼아 댈 때 나는 참으로 사라지고 없겠죠.

 

아직은 숨 쉬니까.

산 자들의 세상에 살아가니까.

대체 이게 살아있는 것인가.

고민할 필요 없죠.

다시 침대로 들어가면 되죠.

언젠가 정제된 문학으로 저 침대를 쓰겠죠.

간 만에 넋두리였습니다. 꾸벅 ^^

 
           
?
  • profile
    버드 2022.09.02 12:52
    아름다운 글이라고 느껴집니다
    힘들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글로 쓰기는 쉽지 않더라고요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분이 너무 힘들어 하는걸 지켜보는 건
    글로 보는것도 슬프네요
    인생은 왜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는 걸까요
    돌파하고 싶은 마음이 들길 바랍니다.
    2018년 글이라 지금은 어떠신지
    근황이 궁금합니다.
  • ?
    風文 2022.09.04 09:32
    읽어 주셔 고맙습니다. 지금은 잘 지내려 노력 중입니다. ^^

자유글판

『아무거나 쓰세요. 손님도 글쓰기가 가능합니다.^^』

Title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동영상 황석영 - 5.18강의 風文 2024.05.22 9078
공지 음악 부활 - 친구야 너는 아니 (시:이해인) 風文 2023.12.30 38009
공지 사는야그 가기 전 風文 2023.11.03 40389
공지 동영상 U2 - With Or Without You (U2 At The BBC) update 風文 2019.06.20 4443
1302 '주식회사' 명칭도, 노동'조합' 이름도 바뀌어야 바람의종 2009.10.08 4128
1301 그림사진 안중근 처형 전 사진 원본 국내 첫 공개 바람의종 2009.10.08 32844
1300 '國會', 명칭부터 바꿔라 바람의종 2009.10.11 4190
1299 채증하면 시비 걸 거야, 그럼 검거해 바람의종 2009.10.13 23407
1298 좋은글 소설가 이외수가 자신의 트위터에 남긴 가을 잠언 바람의종 2009.10.27 26509
1297 교황청 “오라, 성공회 신도들이여” 바람의종 2009.10.27 31421
1296 '대통령'은 일본식 용어 바람의종 2009.10.27 4557
1295 좋은글 전화 바람의종 2009.10.27 27582
1294 좋은글 성실하게 산다는 것 바람의종 2009.10.27 28272
1293 그림사진 미세 정밀 사진 바람의종 2009.10.27 50984
1292 명성황후 친필편지 경매 나왔다 바람의종 2009.10.27 36120
1291 좋은글 습관 때문에 바람의종 2009.10.28 25155
1290 좋은글 5번째 순례 길에서 바람의종 2009.10.28 25053
1289 왜 언어가 중요한가? 바람의종 2009.10.28 4257
1288 국회 용어, 이것만은 고치자 바람의종 2009.11.02 3747
1287 좋은글 우연히 마주쳐진 정운찬 총리의 낙동강 방문 현장 바람의종 2009.11.02 26866
1286 '긴 이야기(novel)'가 어째서 '小說'이 되었을까? 바람의종 2009.11.03 4336
1285 좋은글 나누는 삶 바람의종 2009.11.03 33284
1284 좋은글 자손만대의 한 - 안동천변에서 바람의종 2009.11.04 2749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 101 Next
/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