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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0 08:00

독서편지 - 제95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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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58호

2014.12.30. (음 11.9)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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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한자 등 텍스트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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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오늘의 어록


씨앗 속에 담겨 있는 것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천재의 눈이다. - 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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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간판 문맹

“제가 모시는 여러 신 중에는 ‘소 신’과 ‘새우 신’이 있습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사람을 위해 온전히 바치어 주기 때문입니다.” 엊그제 찾은 일본풍 선술집 점원이 장난기 섞인 웃음과 함께 새우튀김을 내놓으며 한 말이다. 종업원의 재치있는 말 한마디가 자리를 환하게 빛내주었다. 그 집에 손님이 많은 것이 음식과 분위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맛깔스런 음식에 아기자기한 실내장식, 종업원의 친절과 재치가 돋보이는 그 집의 이모저모가 좌중의 화제에서 빠지지 않은 걸 봐도 그렇다. 모든 게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이 집 찾기 참 힘들었다”는 볼멘소리가 나왔으니 말이다.

그 집에 초행이었던 네 명이 모두 그랬다. 이유는 하나였다. 가게 간판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흰색 네모꼴 간판에는 큼지막한 일본어와 그 아래 작게 쓴 영어만 적혀 있었으니 그럴 만했다. 자리 파하고 나와 그 동네를 둘러보니 한글 없이 외국어로만 쓴 간판이 새삼 눈에 많이 들어왔다. 옷가게와 커피숍, 아이스크림 전문점, 빵집 등은 영어로만 쓴 간판이 오히려 많았다. ‘세계 공용어’ 대접을 받는 영어는 접어두더라도 언제부터인가 부쩍 늘어난 일본어 간판 앞에서 ‘문맹’이 되는 경험을 한 사람은 우리뿐이 아닐 것이다.

중국은 소수민족 자치주에 거주민족 문자 표기를 의무화했다. 연변에서는 ‘한글(조선어)과 한자(중문)를 병기하되 한글을 먼저 표기’해야 한다. 프랑스어권인 캐나다 퀘벡주는 간판에 프랑스어 표기를 하지 않은 업주에게 강력한 행정처벌을 내린다. 관급공사 수주 자격을 박탈하고 고액의 벌금을 매기며 연속 적발될 경우 가중 처벌하는 것이다. 간판은 공공디자인이고 그에 담긴 언어는 공공성을 띤다. ‘한글 간판의 새로운 모색’을 주제로 전시회가 열린 까닭, ‘한글 간판 의무화 법 제정’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간판 문맹’을 없애자는 것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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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우리나라 詩


축음기 - 신정민

부처에게 전보를 쳐라

덕진 연못 연꽃 좌대 비었으니
한 번 들르시라고

소리는 신통치 않지만
작은 바람에도 직직거리는 확성기들 모아
어느 스피커에서 소리가 날까
진언 들을 준비 마쳤다고

빈 벤치들
어느 것이 이 낡은 기계의 볼륨스위치인가

태양열로 충전 중인 연못

검은 연밤 마이크 붙잡고
목청껏 소리 질러도 들리지 않는
늪의 노래나 들으면서 기다리겠노라고

가만 귀 기울이면
켜켜이 쌓여 있는 우렛소리
떨리는 듯 패인 홈에서 무뎌진 바늘 끝

그 바늘 끝이 풀어내는 신음,
먼 이국의 아침을 지나가는 자전거 방울소리인가
아침잠에서 돌아눕는 와불의 옷자락 소리
바람에 묻어 있다

귀를 열고 빛을 모으는 연잎 좌대
덕진 호수 텅 비었다고 출렁,
연못 가로질러 간다

떠도는 부처 한 번 들렀다 가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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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명상/지혜/처세


영혼을 위한 닭고기 스프 2 -
잭 캔필드&마크 빅터 한센


  누구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평범한 사람과 전사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사도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이지만, 평범한 사람은 모든 것을 행복이나 비극의 관점 에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돈 후앙(야키족 인디언 스승)

 로저 크로포드는 테니스를 치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두 손 과 한 쪽 다리는 제외하고는. 로저가 태어났을 때 부모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이는 오른쪽 손목 끝에서 곧바로 엄지손가락 같은 것이 튀어나와 있었으며, 왼쪽 손목 끝에 도 엄지손가락과 또 하나의 손가락이 딱 들러붙은 채로 솟아나와 있었다. 아이는 손바닥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팔과 다리가 비정상적으로 짧고, 안쪽으로 휘어진 오른발에는 발가락 이 세 개뿐이었다. 왼쪽 다리마저 비정상적으로 가늘었다. 왼쪽 다리는 나중에 절단 수술을 해서 의족을 매달게 되었다.  의사들에 따르면 로저 크로포드는 엑트로 닥틸리즘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있었 다. 미국에서 태어나는 어린이 9만 명 중에서 한 명꼴로 나타나는 선천성 기형 이었다. 의사는 로저가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거나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살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최종 진단을 내렸다. 다행히 로저의 부모는 의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부모님은 언제나 가르쳤지요. 내가 생각하는 만큼만 난 장애자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로저 크로포드는 말한다.
 "두 분은 내가 자신을 비관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장애자라 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셨지요. 한번은 내가 학 교 숙제를 매번 늦게 내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겼던 적이 있습니다." 로저는 손바닥이 없었기 때문에 두 손목으로 연필을 잡고 천천히 글씨를 쓸 수밖에 없었다.
 "난 다른 학생들보다 이틀 정도만 숙제 제출 기간을 연장받을 수 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부탁을 드려달라고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그러 자 아버지는 단호히 거절하시면서, 오히려 선생님께 부탁드려 내가 다른 아이들 보다 이틀 먼저 숙제를 시작할 수 있게 하셨지요."

 로저의 아버지는 로저에게 항상 운동을 하도록 격려했다. 로저에게 배구공을 받고 던지는 법을 가르쳤으며, 방과후에는 동네에서 미식 축구를 하게 했다. 그 결과 열두 살에 로저는 학교 미식 축구 팀의 일원이 되었다. 경기가 시작될 때마다 로저는 자기가 터치 다운(미식 축구에서 자기 편으로부 터 받은 공을 자기 편 골 라인 바닥에 대는 것)을 해서 점수를 올리는 장면을 마음 속으로 상상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로저는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공이 자기의 두 팔 안으로 날아 오자, 로저는 의족을 움직이며 있는 힘껏 골 라인을 향해 달려갔다. 감독과 팀 동료들은 열광적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10야드 라인을 앞두고 상대편 선 수가 달려들어 로저의 왼쪽 발목을 붙잡았다. 로저는 빠져나오기 위해 힘껏 의 족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빠져나오는 대신 의족이 다리에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난 여전히 넘어지지 않고 서 있었지요."
 로저는 그때를 회상하며 말한다.
 "난 달리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에 그냥 한쪽 다리로 뜀뛰기를 해서 골 라 인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주심이 달려와서 하늘 높이 팔을 치켜들며 터치 다운 을 선언했지요. 내가 올린 6점이라는 점수보다 더 보기 좋았던 것은 내 의족을 들고 황당해하며 서 있는 상대방 선수의 얼굴 표정이었습니다." 로저 크로포드는 스포츠에 대한 열의가 날이 갈수록 깊어졌으며, 자신감도 따 라서 커졌다. 그러나 의지력의 힘만으로 모든 장애물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점심 시간에 음식과 씨름을 하면서 밥을 먹는 모습을 다른 학생들에게 보이는 건 로저에게 큰 고통이었다. 타자 수업 시간에 연거푸 실수 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로저는 말한다.
 "난 타자 수업을 통해 매우 중요한 교훈을 배웠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할 수 없는 것보다 할 수 있는 것에 정열을 쏟는 것 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난 배웠던 겁니다."
 로저 크로포드가 할 수 있었던 한 가지는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힘껏 라켓을 휘두르면 손가락의 움켜쥐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그만 라켓 이 공중으로 날아가곤 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로저는 운동구점에서 이상하게 생긴 테니스 라켓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것은 두 겹으로 된 손잡이 사이에 손가 락을 끼워 넣을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라켓은 로저의 손에 딱 맞고 편안해서 스윙과 서브와 발리를 정상인처럼 할 수 있게 되었다. 로저는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을 했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 아서 경기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아니, 경기에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로저 크로포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경기에 경기를 거듭했다. 왼쪽 손의 두 손가락을 수술해 특수 라켓을 더 잘 움켜쥘 수 있 게 되었고, 경기 내용도 크게 좋아졌다. 비록 그에게 모델이 되어 줄 만한 인물 은 없었지만 로저는 테니스에 열중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서 경기에 이기기 시작했다. 로저 크로포드는 대학 테니스 팀에서 활약해 경기 전적 22승 11패를 기록했 다. 훗날 그는 신체 장애자로선 최초로 미국 프로 테니스 협회에서 주는 테니스 교습 자격증을 수여받았다.

 로저 크로포드는 현재 미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사람들에게 강연을 하고 있다. 강연 내용은 우리가 어떤 불리한 환경에 처해 있든 그 환경을 이겨 내는 길에 대한 것이다. 로저 크로포드는 말한다.
 "당신과 나의 유일한 차이는 당신은 나의 장애를 볼 수 있지만 난 당신의 장애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신체적이든 정신적 이든 어느 정도의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신체적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느냐고 불으면 나는 대답합니다. 난 아무것도 극복한 것이 없다 고.  난 다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친다거나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일을 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웠습니다.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내 온 마음과 영혼을 바쳤을 뿐입니다."

잭 캔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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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과학


우연의 과학 - 이야마 히로유키, 옮긴이: 이정임


  프랭클린과 벼락

  우연과 낙하 현상과의 의외의 관련이 앞 장에서는 명확해졌다. 담시 과학 역사 속에서 소문난 낙하사건을 우연과 관련지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가장 무서운 것은 벼락이다. 벼락 현상은 천상의 신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벼락은 그리이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가진 활활 불타는 창이었고, 리투아니아의 민간  전승에 의하면 하늘의 대장장이 페르쿠나스가 지상으로 떨어뜨린 불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의 찬가 베다에 기록된 폭풍의 신 인드라는 바쥬라라고 불리는 번개를 항상 가지고 다녔는데, 그것들은 막대나 원반 무기로서 자주 그려졌다. 천둥은 신들끼리 싸울 때의 생생한 소리로 기록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지상의 인간에 대한  분노를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써 무방비 상태인 인간의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벼락이 신들의 무기인 이상 우러러보는 인간으로써 어느 정도 그 낙하를 예상치 못한다고 해도 그 공격 행위의 배후에는 반드시 신의 결연한 의지가 존재했다. 인간 측에서는 불투명하지만, 거기에는 우연이 아닌 노여움을 받을 만한 원인이 상정되어 있다.

  제1장에서 소개한 이야기 중에서 불쌍한 세미마루를 역경으로 몰아낸 것은 부왕인 다이고 천황이었는데, 그 다이고 천황의 신상에도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부상악기'의  기술에 따르면, 연장8년 6월 26일 벼락이 청량전에 떨어진 후 천황은 병에 걸려 3일 후에 죽었다. 또 세미마루를 오사카 관문까지 데리고 가서 임금의 명령이라고 냉혹하게 버리고 온 태정관 차관 후자와라 기요츠라는 이 벼락에 맞아 즉사했다. 이것은 유명한 이야기인데, 이 930년의 낙뢰도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연희 원년(901)에 또 다른 후지와라 도키히라의 중상모략으로 태재부에 좌천된 불운의 사나이 스가와라의 한맺힌 혼령이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쿄토의 키타노에 있는 텐만궁이 건립되었던 것도 이러한 해석에 의한 것으로, 벼락이 치면 사람들이 "구와바라 구와바라"라고 소리높여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구와바라란 스가와라공의 봉토가 있던 곳으로 930년 이후 한 번도 벼락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주문이 생겨났다고 한다.

  신의 원령을 번개불의 원인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낙뢰현상의 배후에 인격적인 존재의 관여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프리니우스는 인간에게 재난을 초래하는 하늘로부터의 여러 가지 강하 현상에 대해서 기록한 곳에서 이러한 현상은 "우연의 지배하에 있고 신조차도 예기치 못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박물지' 제2권) 특히 벼락은 별이 있는 불이 낙하한 것으로 보고, 섬광이 구름을 갈라 관통하여 번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과연 프리니우스의 말대로 벼락은 우연히  떨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원인이 있어서 필연적으로 떨어진 것일까? 18세기가 되어 마침내 한 가지 해결을 보게 되었다. 상대성이론을 완성한 아인슈타인이 다시 태어나면 물리학자가 아니라 연관공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금까지의 생애를 처음부터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 조금도 이견이 없다"고 '자서전'의  머리말에서 자신의 생애를 회고한 사람이 있다. 미국 자본주의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바로 그다. 프랭클린의 정치상의 공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팔라델피아에서 실행된 거대한 연의 실험이라면 한번 정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현재도 펜실베니아 대학 구내에 역사적인 실험 현장이었던 지점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미 인쇄업자로서 성공하고 문필 활동도 정력적으로 하고 있던 프랭클린 앞으로 영국의 왕립협회 회원 코린슨이 보낸 전기 실험용 유리관이 도착한 것은 1746년의 일이었다. 전기 실험이라고 해도 당시는 마찰에 의해 생기는 정전기를 순간적으로 방전시켜 그 결과 발생한 쌀알눈만한 전기 불꽃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거나, 가벼운 것으로 끌리는 인력에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내거나, 손이나 발에 대고 감전 쇼크를 즐기는(전기가 너무 강해 고통을 당한 경우도 있다) 것과 같은 실험이 주류를 이루었다. 라이덴병(뇌전:라이덴, 벼락)과우연히도 일치하지만, 네달란드의 도시 라이덴의 학자가 발명한 축전병을 말함)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도 1746년으로, 그때까지는 마찰에 의한 대전체(유리나 송진이나 유황등)가 유일한 전기원이었다.


    여명기의 전기 연구
  프랭클린이 취미로 전기 실험을 시작한 후 최초의 논문을 쓴 해까지 영국 왕립협회 기관지인 '필로서피컬 트랜잭션션즈'에 투고된 전기 연구 역사를  살펴보자. 이 과학잡지는 1665년에 창간된 이래 본국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의 일선에서 활약한 연구자의 논문을 계속해서 실었다. 19세기 초까지 서구 근대과학의 활동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마도 가장 좋은 정보매체였을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전기학자들의 논문들이 현재의 과학논문으로 생각되는 것과 크게 다른 것은 읽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1) '여러가지  물체의 마찰로 발생하는 전기와  빛에 관한  실험 보고'(호크스피,  26권, 1708, 89-92페이지)-원통형으로 자른 나무판을 밀납으로 싼  것을 프란넬천이나 손가락으로 문지를 때에 생기는 전광을 야간에 관찰한 것.
  (2) '전기 인력을 동물이나 무생물에 작용시킬 때에 생기는 빛이나 그것에 따른 매우 놀라운 효과에 관한 실험과 고찰'(그레이, 39권, 1734, 16-24페이지)-강한  비단실로 건강한 사내아이를 묶고 거기에 마찰 전기를 띠게 한 후 그 아이의 손이나 발에 가까이 대면  쇼크를 느끼는 실험등, 같은 것을 닭이나 소등심에도 실시했다.
  (3) '전기를 띤 물체가 가진 반발력에 관한  보고'(필라, 39권,  1734, 400페이지)-마찰시켜 대전시킨 송진 위에 작은 쇠공을 놓고 가는 실로 작은 코르크 등을 묶고 그 쇠공에 가까이 대면 행성과 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기 시작하는 것을  관찰했다. 실험하는 중에 필자가 사망했기 때문에 편집자는 얼마 안 있어 소형의  플라네타륨(천계의  운행을 나타내는 기계) 이 만들어진 것을 보고 그 죽음을 애석해 했다.
  (4) '1738년 4월 15일에 황태자의 크리후덴 저택에서 실시된 전기를 직선으로 420피트 전달시킨 실험 보고'(데자규리에, 41권, 1738, 209-10페이지)-포장용 끈이나 고양이 장을 이용해서 전기가 어느만큼 멀리까지 전달되는가를 실험했다. 저택의 정원에서 마찰 전기를 일으켜 거기부터 끈을 통해 저택의 실내문까지 전달시키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던 실험.
  (5) '인체나 동물의 몸에서  나오는 발광체의  방산에 대한 고찰'(마이루즈, 43권, 1745, 441-46페이지)-스잔나 시월 부인의 촛불  미사를 드리는 동안 계속  불꽃에 감싸여져 있었다는 이야기와, 그 친척이 페치코트를 벗으려고 했을 때도  불꽃이 나왔다는 사건에 대해서. 고양이 털을 빗으로 빗었을 때도 같은 현상이 관찰되었다는 것이 보고되었다.
  (6) '전기에 감전된 사람과  그 아내가 받은 전기 효과에 관한 편지'(빈크라, 44권, 1746, 211-12페이지)-네덜란드의 연구자 뭇센브레이크의 실험을 전해  듣고 자신의 몸에 전기를 통하게 하자 큰 쇼크를 받았다는 논문. 맥박은 빨라지고 체온도 올라갔기 때문에 해열제를 복용했지만 머리는 무겁고 코피까지 나왔다. 실험적으로  아내에게도 전기를 감전시켜 보았는데 역시 쇼크를 받아 걸을 수 없게 되었다는 보고가 이어진다. 따라서 전기가 생명이 있는 것에 흐르게 하는 것을 중지하자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7) '식물에 대한 전기 효과에 관한 편지'(브라우닝,  44권,  1746, 373-75페이지)-가끔 자기 집에 있었던 인동덩굴과 식물에 전기를 흘려보내 관찰했을 때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끝에서부터 보라색 빛을 발했다는 편지이다.  사람을 설득해서 피를 흘리게 한 후 전기를 통하게 했는데, 피가 흐르는 속도에는 변화가 없었다는 잔혹한 추가 실험도 이루어졌다.
  (8) '파스티앙 직물 상의에 전기로 불을 붙인 것에 관한  편지'(로쉐, 45권,  1748, 323-25페이지)-아들이 10세 경에 발작으로 쓰러져 성바소로뮤병원에서도 불치병이라는 진단이 내렸기 때문에 마지막 수단으로 하루 2회 전기를 흐르게 하자 병세가 약간 회복되고, 훨씬 강한 전기를 흐르게 하자 아들이 입고 있던 상의에 불이 붙었다는 관찰 보고.
  (9) '왕립협회의  신사연합에  의한 전기 절대 속도의 측정실험'(워트슨,  45권, 1648, 491-96페이지)-2마일 정도의 회로를 만들어 한쪽 단자에 전기충격을 준 후 다른 단자를 잡은 사람이 쇼크를 받을 때까지의 시간을 측정했다. 몇 번  길이를 바꾸어 보아도 전기는 순간적으로 흐른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10) '전기력에 의해 유리 너머로 악취를  전달시키는 것에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실패했다는 것을 선언하는 편지. 특히 보제 교수가 위덴베르그에서 실시한 전기에 의한 인간 미화 실험과 역시 전기로 사람의 머리 주위에 후광을 만들어내는 실험에 대한 검토가 포함되어 있다'(위트슨, 46권, 1749, 348-56페이지)-수지나 역청을 바르고 그 위에 사람을 눕힌 후 전기를 흐르게 하면 발끝이나 손끝부터 머리 방향으로 차례차례 빛을 띠게 되어 마지막에는 화가가 성인을 그린 것같이 멋있는 후광이 만들어진다는 보제 교수의 실험을 해보았지만, 그런 불가사의한 현상은 없었다고 분하게 여기는 논문이다. 그 내용을 본인에게  전달하자 실제로는 잘 닦은 갑옷을 입은 사람을 데리고 실험했고,  표현이 너무 시적으로 되어 오해를 일으킨 것같다는 사죄의 답변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첨부되어 있다.
  (11) '전기에 의해 생기는 일부  현상에 관한 검토'(노레,  46권,  1750, 368-69페이지)-후에 프랭클린의 논적이 된 프랑스 신부가 이탈리아  여행중에 보 불가사의한 빛에 대해  보고했다. 어둠속에서 바다가 발광성 곤충으로 인해 빛나고 있는 광경을 전기가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편지로 알려왔다.

  한 번 읽어보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전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측불허의 제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여기 저기에서 '놀라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새로운 에너지원으로서 주목받으며 실용적인 편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1세기 반 정도의 세월이 지나야만 되었다. 그것도 18세기 말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연한 발견이 없었다면 도시의 조명이나 기계의 동력원 등은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을뿐더러 실현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 귀중한 발견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브라우닝의 연구 등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색다른 실험을 좋아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선인장에서 모차르트를 듣게 하거나(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후쿠시마현 키타가타시의 고하라 주조가 효모에 모차르트 음악을 들려줘서 향이 좋고 맛이 있는 청주 '클래식'을 제조하는데 성공해 판매하고 있다). 벅스터와 같이 미모사에 폴리그래프(거짓말 탐지기)를 접속하거나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브라우닝의 직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데자규리에의 보고 논문에서는 영국 황태자가 참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정을 잘 모르면 기이하게 비춰질 수도 있다. 이것은 씨름판에 왕(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시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실험은 이제부터  말한 연 실험이나 혹은 파리 시민을 열광의 도가니에 바뜨린 기구 실험인데, 세상에 도움을 주기 위한 실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민중이나 귀족을 즐겁게 하는 오락으로서의 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오락으로서의 실험
  이런 전기 연구의 얼마되지 않은 전통을 이어받아 프랭클린은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서 홀로 실험을 시작했다. 그 무렵 그는 펜실베니아주 서기로 일하면서 도로에 포장 외에 조명에 관한 조항을 첨부하는 법안을 기초하고 있었다. 후에 역사의 전개로 볼 때 매우 흥미진진한 점은 공익을 생각해서 램프로 도로 조명계획을 세우고 있던 그 사람이 취미로 전기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명과 전기라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과제가 상상력이 풍부한 프랭클린에게는 꿈속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만큼  전기는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렇지만 전기 실험은  우리들이 알지 못한 다른 요소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프랭클린은 이런 실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스크루킬 호반에서 전기에 관한 연구 모임을 개최했을 때에 이야기다. 강의 오른쪽 기섥에서 왼쪽 기섥까지 전기 불꽃을 날려 술에 불을 붙이고, 전기 쇼크로 칠면조를 잡고, 그것을 회전기구 꼬챙이에 끼워 라이덴병으로 점화한 불로 구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전기  장치를 한 포병대가 공포를 쏘고 전기를 띤 잔으로 각국의 유명한 전기학자를 찬양하면서 건배하는 파티를 했다. 다시 말해 이 시대 사람들은  전기가 직접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가능성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분한 인생의  경이로움과 감격을 주는 오락의 한 가지 정도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전기 실험이 18세기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다음 이야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지금은 믿을 수 없지만 그 시애의 전기 실험은 실업자 구제에 한 몫을 했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중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새로운 기적'으로서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기 시작한 전기 실험을 한 번 보려고 매일같이 많은 손님이 프랭클린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이 번거로움을 조금씩 친구들과 나누기  위해 그 지방의 유리공장에 부탁해서 같은 모양의 유리관을 몇 개 만들어 이것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침내 이 실험을 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몇 명 생겨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친구는  키나즈리씨로, 그는 이웃에 있었던 재주있는 사람으로 그 때 당시에는 실업자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돈을 받고 실험을 보여주면 어떻겠냐고 권유하며 그를 위해 두 편의 강의안을 작성했는데, 그 강의안은 실험 순서나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고, 앞의 내용을 이해하면  다음 것도 할 수 있도록 작성되어 있었다. 그는 이 실험을 위해 매우 훌륭한 실험 기계를 갖추었는데, 내가 전에 혼자 힘으로 만들었던 조잡했던 기계류가 모두 기계 전문가의 손에 의해 훌륭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의 강의에는 많은 사람이 참가했고 모두 크게 만족해했다. 얼마 후 그는 각  식민지를 순회하며 각 식민지의 수도에서 이 실험을 공개해서 상당한 돈을 손에 쥐었다.

  이와 같이 관중을 모아 거리의 악사처럼 사람들이 던져주는 돈이나 입장료를 모아 실험을 하는 강연회가 이 시대에  나타나서 과학자가 직업으로서 성립된  19세기 중반가지 백년간, 일부 연구자에게 생계나 발표의 장을 보장하고 있었다는 것은 과학의 역사를 회고하는데 있어서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이다. 파리의  왕립식물원에서 실시된 공개 실험과  같이 사실상 오늘날의 대학 이학부의 강의 수준의 내용도 있었고, 골목 안에서 대중에게 사기 실험을 하거나 가짜 의료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사가는 이 시대의 과학 활동을 '아마추어 과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활동이라는 의미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을 실질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과거의 중요한 발견이나 연구의  대부분이 이 아마추어 과학 세계에서 성립된 것을 생각하면,  과학이 미숙했던 시대의 활동이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번개와 전기
  전기 실험에 흥미를 느껴 혼자서 연구 실적을 쌓아 훌륭한 실험가가 된 프랭클린은 기구를 보내준 코린슨에게 실험 성과를 빠짐없이 기록한 감사장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당시 과학의 선진국이었던 영국의 과학 애오가들과의 편지 왕래가 시작되고, 그러던 중 프랭클린은 번개와 전기는 같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역사적인 논문을 1749년 11월 7일에 보내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이유로 번개의 정체를 전기라고 단정했다.

  (1) 결과적으로 빛과 소리가 닮았고, 둘 다 거의 순간적으로 전달된다.
  (2) 전기 불꽃은 벼락과 마찬가지로 물체에 불을 붙인다.
  (3) 둘 다 생물을 죽인다.
  (4) 둘 다 기계적인 손상을 입히고 유황이 타는 것과 같은 냄새가난다.
  (5) 번개와 전기도 같은 도체에서 흘러가고 신속하게 뾰족한 끝에 이른다.
  (6) 둘 다 자석의 효력을 없애거나 자석의 극을 바꾸어 버린다.
  (7) 둘 다 금속을 녹이는 경우가 있다.

  프랭클린 시대에도 벼락의 유래를 신적인 관여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비인격적인 자연현상으로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시대의 자연 연구가는 이전 세기의 데카르트의 자연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데카르트는 1636년에 쓴 '기상학'에서 벼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벼락이나 번개나 회오리바람이나 낙뢰를 동반한 폭풍은 얼마만큼의 구름이 모여 있을 때에 위의 구름이 아래 구름의 위로 갑자기 낙하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로 인해 일어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번개나  회오리바람이나 낙뢰의 여러 가지  차이를 말하자면 그것은 두 개의 구름 사이의 공간에 있는 증발물의 성질 및 위의 구름이 아래 구름 위에 낙하하는 방법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앞에 건조하며 매우 뜨거운 열이 있고, 이 공간에 매우 미세하고 매우 타기 쉬운 증발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으면, 위의 구름은 대게 커지고 신속하게 하강하기 때문에 그 구름과 아래 구름과의 사이에 있는 공기를 몰아내고 그 공기에서 전광, 즉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리는 가벼운 불꽃을 내는 것이다...
  이것에 반해 타기에 적합한 증발물이 공기중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천둥 소리는 들리지만 번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더 높은 구름이 조각 조각으로 차례차례 낙하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번개와 천둥이 발생한다...

  구름의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에 있다고 데카르트가 생각한  '타기 쉬운 증발물'을 18세기의 많은 지식인은 유황을 포함한 가연성 증기 또는 질산칼륨 공기가 아닐까하고 상상했다.  하늘에 울려퍼지는 천둥은 마치 폭발음같이 들리기 때문에 13세기 경에 사라센인에 의해 전해진 흑색화약의 주성분(유황, 질산칼륨, 목탄)이 구름에 떠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질산칼륨은 라틴어로 사르 페트라에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태양의 돌'이 된다. 가연성을 가진 돌이기 때문에 태양 기원의 물체 즉 하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천둥이나 번개의 원인을 하늘에서 발생한 폭발로 설명하려는 것이 당시의 주류였다. 이 시대의 자연 연구가의 기교스러운 활동을 풍자한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 제3편에는, 라가드학사원(영국 왕립협회를 야유한 것)이라는 국립과학연구소가 있는데, 그곳에 근무하는 어느 이상한 연구가는 얼음에서 화약을 만들려고 하였는데, 천둥이 친 직후에 우박이 내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박을 분석하면 그 중에 화약의 원료인 유황이나 질산칼륨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너무나 정상적인 발상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프랭클린의 논문은 꽤 독창적인 것으로 사람들의 눈에 비춰졌을 것이다. 확실히 빈클러와 같은 선구자는 있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고전어학 교수였던 그는 전기 충격에 의한 불꽃을 번개와 벼락의 일종으로 가정하는 논문을 1746년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어서 확실한 증거가  부족했다. 예를 들면 오일러와 같은 대표적인 지식인으로부터 몽상가의 허튼 소리로 간주되었다. 그에 비하면 프랭클맅의 번개전기설은 가설의 설득적인 어조로도,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후의 실험으로도 당대 제일의 것이었다. 부인과 함께 전기 쇼크를  받고 깊이 잠들어 버린 빈클러를 훨씬 능가한다고 생각된다.

  빈클러를 알 리 없었던 프랭클린이 멀리 떨어진 신대륙에서 쓴 논문은 이미 제출된 것과 함께 식물학자 미첼의 노력으로 런던왕립협회에서 구두 발표되는 단계에 이른다. 1751년 6월 1일의 일이었다. 최초의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유황이나 질산칼륨 공기의 폭발설을 지지하고 있던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유감스럽게도 정보와 물자가 부족한 식민지로부터의 보고라는 이유만으로 구세계에 선구적인 새로운 법칙을 초래하는 획기적인 논문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생떽쥐베리가 '어린왕자' 중에서 아무렇지 않게 썼던 이야기는 18세기 런던에서도 해당될지 모른다.  어느 천문학자가 새로운 별의 발견을 학회에 보고했는데, 민족 의상을 입고 있어서 신용을 못 받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프랭클린이 그 당시 학회로부터 과학의 총아로서 무조건적인 칭찬을 받게 되기까지의 경위에는 번개가 떨어지는 경우의 우연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우연이 작용했다. 프랭클린의 논문이 읽혀진 학회에서 알게 된 의사가 있었는데, 평생 식민지 지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포자길 박사가 바로 그였다. 박사는 논문을 인쇄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하고 일부러 서문까지 써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서전'에 의하면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행해진 전기에 관한 새로운 실험과 관찰'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팜플렛은 중판을 거듭해 5쇄까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프랭클린은 1펜스도 인세를 받지 못했다고 투덜댔다. 그러나 런던 학계의 반응은 한결같이 냉담했고, 처음에는 이렇다할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오히려 영어로 쓰여진 처음의 논문집이 시판되지 않았던 파리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알 사람은 다 알게 되는 것일까? 후대의 역사가는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가치있는 연구가 역사 속에서 묻혀버리려는 순간에  선견자의 눈을 가진 인사가 등장해서 그것을 옹호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프랭클린의 문제의 논문집을 우연히 입수해 프랑스어로 번역한 다음 인쇄하도록 배려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세기를 대표하는 박물학자 뷰퐁이었다.

  그 후 번개전기설을 포함한 프랭클린의 논문집은 이태리어, 독일어,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 유럽에서 읽히게 되었는데, 그 보급에 가장 힘을 써 준 인물은 재미있게도 프랭클린의 학설에 이론을 제기한 노레 신부였다. 노레 신부는 프랭클린이라는 연구자는 틀림없이 가공의 인물로 자신의 학설을 반박하기 위해 파리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변경이었던 필라델피아라는 지명을 보고 수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프랭클린이 실재하는 것을 확인하자  아카데미에 부지런히 반론을 투고했다. 당연히 그 반론에는 프랭클린의 이름이 재삼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에 번개의 정체를 전기로 단정하는 이설의 장본인으로서 사람들의 눈에 띄는 기회가 된 것이다. 동시대의 프리스틀리 박사로부터 '인류에 대한 최대의 실용상의  공헌'이라고 절찬을 받은 이 논문집을 읽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 '프랭클린주의자'라고  불리는 연구자를 대량으로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 실험
  프랭클린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1752년 5월 10일 수요일 오후 2시에 일어났다. 논문집에는 번개의 본성을 확인하는 실험 방법이 명기되어 있었다. 비오고 번개치는 날에 지상에서 긴 철봉을 들고 있으면 번개에 있는 전기로 인해 철봉을 대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두 명의 프랑스인이 시도했다. 다리바르와 드 로르가 각각 독립적으로 했다고 되어 있는 실험에 대해서 같은 시기의 프리스틀 리가 쓴 '전기 연구의 역사와 현상'(초판, 1767년)이라는 가장 오래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다리바르씨는 파리에서 24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르리 라 뷰 마을에 실험 기구를 설치했다. 드 로르씨는 수도 파리의 고지대에 있는 자택을 실험 장소로 선택했다. 다리바르씨의 기계는 길이 12미터 정도의 철봉으로 하단을 상자로 싸여 있어서 빗물로부터 안전했다. 외부는 세 개의 나무 막대로 지탱하고 비단 끈으로  확실히 붙들어 매어져 있어서 역시 빗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기계야말로 하늘의 불의 방문을 사상 최초로 받아들이는 영애를 차지하게 되었다. 본인은 그 순간에 현장에 마침 없었지만 그가 없을 때에는 코아피에라는 14년의 경력을 지닌 체력도 이해력도 있는 용기병(16-17세기 유럽에서 갑옷에 총을 든 기마병)이 책임을 지고 기계를  지키도록 의뢰해 놓았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관찰하면 좋은지, 어떻게 위험을 피하면  좋은지 적절한 지시를 받았다. 거기에다가 폭풍이 온 시점에서 근처 사람을 불러 입회시키고 특별히 마르리 교구의 사제를 불렀다. 마침내 오랜 시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폭풍이 몰려왔다. 1752년 5월 10일 수요일 오후 2시와 3시 사이에 코아피에는 무시무시한 천둥 소리를  들었다. 그는 바로 뛰쳐나가 놋쇠  끈을 댄 대전용 병을 철봉 하단의 상자에 접촉시켰다. 그러자 거기에서 작지만  눈부신 불꽃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톡톡하고 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는 불꽃과 파열음을 다시 관찰함과 동시에 근처 사람들을 시켜 사제를 불러오도록 부탁했다. 사제는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그 다음부터는 영혼을 인도하는 손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광경을 본 교구민들은 벼락에 맞아 불쌍하게 죽은 코아피에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모여들었다. 놀라는 소리가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우박이 내리는데도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는 줄지가 않았다. 실험 기계가 있는 곳에 도착한 성실한 성직자는 더 이상 위험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 놋쇠 끈에 손을 대보았다. 그러자 강한 전기 불꽂이 일어나고 확실히 그것이 전기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하던 발견은 실현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앙심이 깊은 교구민들은 실험의 성과를 보고 싶어서 모인 것이 아니었다. 모독죄를 범한 실험가가 신의 노여움을 받아 죽는 것을 보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코아피에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학이 승리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후 경과를 생각하면 코아피에가 죽지 않고 실험이 끝난 것은 우연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벼락의 정체가 전기인  것을 증명했다는 기념할 만한 실험의 일부이다.

  한편 드 로르씨는 8일 후에 자택에서 같은 현상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때는 구름만 지나가고 천둥은 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기(지구를 둘러싼 공기의 전체)에서 전기를 모으는 실험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물론 이것만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획기적인 실험은 오히려 프랭클린 본인에 의해 필라델피아에서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조금 더 기다려주기 바란다. 다리바르의 실험 성공에 관한 소문은 즉시 파리 궁정까지 전달되었다. 루이 15세는 너무나 호기심이 생겨서 측근에게 명령해 드 로르에게 수도에서  재실험을 하도록 지시했다. 32미터 정도의 철봉을 세워 다시 한 실험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국왕은 경이로운 실험의 발안자 프랭클린의 영예를 찬양하고, 이후 프랭클린은 직접 한  실험이 아니라 다리바르와 드 로르가 '필라델피아의 실험'이라고 경외감을 안고 부른 실험에 의해 유럽에서 더욱 유명한 전기학자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전신 기술 등을 생각할 수 없었던 시대의 일이었다.  대륙에서의 이러한 상황 변화가 프랭클린에게 전달되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프랭클린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눈으로 벼락의 정체를 보고자 했다. 맨 처음은 다리바르 등에서 제안한 것과 같은 방법을 취할 예정이었지만, 비 내리며 벼락치는 날을 기다리던 중에 연으로 하늘에서 직접 벼락을 지상까지 강하시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1752년 6월의 일이다. '문득 생각이 떠오르다'라는 영어  표현은 풀 어폰이고, 또 독일어에서도 에인폴른인 것을 생각하면 마치 프랭클린의 착상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우연같기도 하다.  '자서전' 쓰는 것을 도운 친구  스튜버의 이야기에 의하면 필라델피아에서의  실험은  매우 소박했다고 한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동행한 23세의 아들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실험의 진행을 알리지 않았다. 비와 벼락을 피하면서 연을 날려 상황을 지켜 보았는데, 전기를 떠올리게 하는 어떤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절망하고 있을 때 비단끈에 보풀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고 끈 끝에 매달아 둔 종에 손가락을  대보니 불꽃이 일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프랭클린이 고대하고 있던 감동의 순간였다. 국왕도 없었을뿐더러 호기심 많은 군중도 없었다. 그는 아들과 단 둘이서 그 기쁨을 나누었다. 여기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하늘의 물질을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실험이 성취되었던 것이다.


    연의 유래
  프랭클린이 실험에 이용한 연에 대해서는 같은 해 10월 19일에 왕립협회 앞으로 보낸 서간 논문에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두 개의 가벼운 삼나무 막대를 십자로 묶고 네 귀퉁이 안을 얇은 비단천을 한 장  붙여서 만든 연에 꼬리에 붙여 실을 연결하면 종이로 만든 연과 마찬가지로 공중에 날아오른다. 비단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비나 바람에도 찢어질 염려가 없었다. 이 연의 정점에 끝이 날카로운 바늘을 붙이고 다시 마로 된 끈의 잡는 부분에 비단 끈을 연결해 둔다. 그리고 마로 된 끈과 비단 끈을연결한 부분에는 종을 달아 두면 된다... 벼락을 몰고 오는 구름이 연 위에 이르면 즉시 구름에서 날카로운 바늘 끝으로 전기가 내려와 마로 된 끈에 보풀이 일어나게 되고... 연결 부위의 종에서는 전기가 다량으로 흐르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종을 유리병에 접속하면 병을 대전시키게 되어, 이와 같이 해서 얻을 수 있는 전기를 사용해서 알콜에 점화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이상을 통해서 전기와 번개를 각각 구성하는 물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프리스틀리가 '매우 간편한 방법. 매우 저렴한 제작비. 얼핏 보기에 진부해 보이는 장치'로 이 경이로운 실험에 성공했다고 감탄한 기분을 알 수 있을 것같다. 일부러 연을 사용한데는 적극적으로 자연에 동참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과학의 심성이 충분히 발휘되어  있었던 것이고, 동시대의 학자에게는 흉내낼 수 없는 프랭클린만의 독창성이 엿보였다. 연을 이용한 사람은 그 때까지 없었던 것일까? 연에 대해서 약간 설명하면, 연은 영어로 카이트라고 하는데, 볼래 소리개를 의미한다. 이것은 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있는  중국에서 '지연'이라고 부르던 것이 그대로 번역된 것이다. 원래는 종이를  발명한 중국에서 고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이 아라비아를 경유해서 서유럽에 르네상스  시대에 도래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한 기록은 나폴리에서 1558년 출판되 장바티스타 데라 포르타의 '자연 마술'의 기술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하늘을 나는 드래곤, 또는 코메트(혜성).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만들어졌다. 자른 갈대를 가로 세로 1:2의 비율로 두 개를 대각선으로 연결해 사각형을 만든다. 그 대각선으로 나머지를 자르고, 같은 크기의 작은 끈으로 연결해 엔진의 머리 부분인 다른 두 개와 서로 묶는다. 그리고나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종이나 얇은 린넨을 붙인다. 다음으로 탑꼭대기나 높은 곳에서 만든 연이 망가지지 않도록 큰 바람이 아니라 일정하게 바람이 불 때에 날린다. 그러나 바람이 적을 때에는 연이 날지 않는다. 직선으로 날리지 말고 옆으로 날리도록 한다. 그것은 양끝에 붙어 있는 끈이 영향도 받는다. 또 종이를 붙여 만든 같은  길이의 긴 꼬리의 영향도 받는다. 기술자의 조작으로 힘있게.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놓으면 이 하늘을 나는 배는 공중을 날게 된다. 그것이 조금밖에 올라가지 않을  때(집들 사이에 바람이 불지 않기 때문이다)에는 조작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대로 잡고 있는 것이 좋다. 여기에 각등을 달면 혜성과 같이 보인다. 종이에 탄환을 넣은 폭죽을 실어 공중에 띄우면 이 날아 다니는 배는 천둥과 같은 소리를 내며 날고 폭발해서 조각조각나서 땅에 떨어진다. 개나  고양이 새끼를 붙잡아 공중에서의 울음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다. 최후의 실험 이야기는 거리낌없이 동물을 학대하는 자연학자의 무신경한 면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한 가지 어이없는 이야기이지만 당시 이탈리아에서 드래곤(연을 나타내는 현대의 독일어 드레첸은 이 이탈리아어에서 유래되었다)이라고 불리는 연에 폭죽을 붙여 벼락을 흉내낸 일은 그로부터 200년 후의 프랭클린의 실험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바람이 강한 날에는 연을 날리지 않기 때문에 비가 오고 벼락이 치는 날에도 당연히 연을 날리지 않겠지만, 만약 프랭클린과 같이 그것을 실행했다면 일부러 폭죽 등을 장착할 것가지 없이 벼락이 그곳에 치게끔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끝에 바늘을 연결해야 하고, 그 결정적인 차이에 의해 프랭클린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만의 하나 포프타의 연에 바늘이 연결되어 있어서 벼락이 떨어졌다고 해도 18세기의 연 실험과 같이 해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벼락의 정체를 화로나 화덕의 불로 간주하거나, 벼락은  벼락 그 자체라고 일체의 설명도 거부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년의 세월은 무익하게 지나간 것만은 아니었다. 호박이나 유황이나 유리를 마찰시킴으로 인력과 척력이 신비한 교착을 반복하는  불가사의한 현상과 같은 지상의 정전현상에 '전기'(일렉트리시티: 호박을 타타내는 그리이스어의 일렉트론에서 유래한 말)라는 이름을 부여했고, 그 배후에 묘한 유체의 존재를 가정하는 사고의 틀이 프랭클린 등장까지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지상을 향하여  수직으로 떨어지는 하늘의 벼락과  지상 생활 평면에서 인정되고 있었던 전기 유체가 연을 매개로 해서 직교성의 충돌을 이룬 사건이야말로 필라델피아의 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연에 불꽃을 매달고 공중에서 폭발시킨 취향은 17세기 중반의 영국에는 자주 있었다고 '비행의 고대사'의  저자 베르트르트 라우파는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필라델피아의 실험이 사람들이 모르는 가운데 성공을 거두기 3년 전인 1749년에도 글라스고 대학의 천문학 교수 알렉산더 윌슨이  '전기 실험용 도선을 부착한 4, 5개의  종이연을 세로로 이어서' 연을 날렸다고 한다. 900미터 상공의 구름 온도를 측정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의 이 지적은 프랭클린의 실험으로부터 26년이나  지난 다음의  일로, 콜럼부스의 달걀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 실험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기 유도용 바늘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은 비오고 벼락이 치는 날에 제우스의 변덕을 조용히 기다리며 조바심내는 것을 두 번 다시 경험할 필요가 없었다. 자택의 안락의자에서 편안히 쉬면서 번개를 유도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같은 해 9월에 그는 마당에 철봉을 세우고 거기에 도선을 연결해서 실내에 있는 벨에 연결시켰다. 이렇게 하면 벨소리로 벼락이 그곳에  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험도 한번밖에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753년 9월  프랭클린이 실내에 벼락의 전기를 끌어들이는 실험의 상세한 내용을 보고하는 편지를 런던에 보낸 직후에 비참한 소식이 왕립협회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과 거의 같은 장치를 만들어 실내의 검전기에 벼락을 유도하려고 했던 페테르부르크의 자연학자 리히만이 불꽅에 맞아 즉사한 것이다. 그 보고가 프랭클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연 실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마찰 이외에 전기를 모으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고, 또 하나는 벼락에 의한 재해를 방지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남아 있다.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의 마을에 1752년 사상 최초로 피뢰침을 세웠다. 이후 유럽 각국에서 피뢰침은 실용화되어 취미로만 했던 전기 연구가 마침내 공익에 도음을 주게된 것이다. 그러나 각 종파의 성직자들은 이 설비에 대해 반대했다. 벼락은 하나님의 뜻으로 벌을 받아도 어쩔 수 없는 못된 사람이 있는 장소에 떨어지는 것인데, 피뢰침으로 본래 피해를 받을 사람이 거기서 벗어나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종두레 의해 천연두를 예방하려고 한 젠나 등이 나중에 반종두론자에게 받은 비판에도 쓰였다. 질병도 신이 인간에게 내린 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은 너무나도 심각한 성직자의 항의를 풍부한 재치로 가볍게 흘려보냈다. 그는 18세기 중반까지 벼락 사고 대부분이 교회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는 오래된 고딕 건축 교회를 제외하면 높은 건물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프랭클린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인해 마침내 교회측도 피뢰침 설치를 인정했다고 한다. 분명 교회에 떨어진 벼락은 피뢰침을 설치하지 않은 성직자에 대한 주님의 노여움이었을런지도 모르는 것이다. 프리니우스 이래 우연 사상의 대표격이었던 낙뢰 현상은 프랭클린의 교묘한 장치에 의해 천지간의 방전작용으로서 받아들이게 되었고, 라이덴병에 축적된 강력한 전기는 새로운 실험에 응용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류가 또 하나의 중요한 실험을 만나지 않았다면 역시 전기 현상은 실험을 흥미나 취미로 하는 사람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중요한 실험은 개구리에 관한 것으로, 보통은 생각할 수 없는 우연이 그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이탈리아의 연구가 갈바니가 겪은 불가사의한 사건을 다루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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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 고사성어


   五里霧中(오리무중 )
  五(다섯 오) 里(거리 리) 霧(안개 무) 中(가운데 중)

  후한서(後漢書) 장해(張偕)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후한(後漢)시대, 경전(經典)에 뛰어난 성도(成都)출신의 장해라는 학자가 있었다. 그는 평소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데다, 그와 교제하려는 황족들이나 귀족들까지 그를 자주 찾아왔다. 그는 이러한 붐비는 생활과 벼슬을 싫어하여 산중에 은거(隱居)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 산에서 저 산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런데 그는 뛰어난 학문외에도 도가(道家)의 도술을 익혀 안개를 일으킬 수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을 때는 사방 5리나 안개를 일으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곤 했다. 그 당시 사방 3리 정도의 안개를 일으킨다는 배우(裵優)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술법을 이용하여 도둑질을 하다가 체포되자, 이 도술을 장해에게 배웠다고 진술하였다. 이 바람에 장해는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五里霧中 이란 거리가 5리나 되는 안개 속에서 방향을 분간하지 못하듯 현재의 상태를 알수 없어 갈피를 잡지 못함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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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다섯 오.  里:마을, 이수 리.  霧:안개 무.  中:가운데 중.
[동의어] 오리무(五里霧). [출전]《後漢書》〈張楷專〉

사방(四方) 5리에 안개가 덮여 있는 속이라는 뜻으로, 사물의 행방이나 사태의 추이를 알 길이 없음의 비유.

후한(後漢) 순제(順帝) 때 학문이 뛰어난 장해(張楷)라는 선비가 있었다. 순제가 여러 번 등용하려 했지만 그는 병을 핑계 대고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장해는《춘추(春秋)》《고문상서(古文尙書)》에 통달한 학자로서 평소 거느리고 있는 문하생만 해도 100명을 웃돌았다. 게다가 전국 각처의 숙유(夙儒-宿儒:학식과 명망이 높은 선비)들을 비롯하여 귀족. 고관대작. 환관(宦官)들까지 다투어 그의 문을 두드렸으나 그는 이를 싫어하여 화음산(華陰山) 기슭에 자리한 고향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그러자 장해를 좇아온 문하생과 학자들로 인해 그의 집은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볐다. 나중에는 화음산 남쪽 기슭에 장해의 자(字)를 딴 공초(公超)라는 저잣거리까지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장해는 학문뿐 아니라 도술(道術)에도 능하여 쉽사리 ‘오리무(五里霧)’를 만들었다고 한다. 즉 방술(方術)로써 사방 5리에 안개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주] ‘오리무중(五里霧中)’이란 말은 ‘오리무’에 ‘중(中)’자를 더한 것인데 처음부터 ‘중’자가 붙어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함.
방술 : 신선의 술법을 닦는 방사(方士)의 술법.

    張楷 性好道術 能作五里霧 時關書人裵優亦能爲三里霧 自以不如楷從學之 楷避不肯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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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자료 → 수필


간디자서전. 시민의 불복종 - 간디 / 함석헌 역


 제2편

28. 푸나와 마드라스

  페로제샤 경은 나의 길을 쉽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봄베이에서 푸나로 갔다. 거기엔 두 파가 있었다. 나는 갖가지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의 도움을 다 얻고 싶었다. 맨먼저 나는 로카만야 틸랙을 만났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각 파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얻어야겠다는 것은 참 옳은 생각이오. 남아프리카 문제에 대하여는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없소. 그러나 회장으로는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을 세워야 하오. 반다르카르 교수를 만나 보십시오. 그는 근래 어떤 파의 공적인 운동에도 참가하지 않고 있소. 그러나 이 문제만큼은 그를 끌어낼 수 있을 거요. 그이를 만나 보고 그가 뭐라고 하는지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당신을 도와 드릴거요. 물론 나를 만나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도 좋소. 나를 마음대로 이용하시오.
  이것이 내가 로카만야를 만난 맨 첫번 일이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 나는 그가 독특한 인망을 얻고 있는 비결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 나는 고칼레를 만나 보았다. 페르구슨 대학 교정에서 그를 만났는데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나는 그의 태도에 곧 마음이 끌렸다. 그와도 이것이 첫번 만남이었는데, 우리는 마치 구면 친구를 다시 만나기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페로제샤 경이 내게 마치 히말라야 같다면 로카만야는 대양 같았다. 그러나 고칼레는 마치 갠지스 강 같았다. 거룩한 강에서는 누구나 원기를 새롭게 해주는 목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히말라야는 기어오를 수 없는 곳이고, 바다에 배를 띄우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겠지만, 갠지스는 누구든 들어와도 좋다고 가슴을 벌린다. 그 위에 보트를 띄우고 노를 젓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고칼레는 마치 교장선생이 입학지원 학생을 조사하듯이 세심하게 나를 조사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누구에게 가까이 해야하며 어떻게 가까이 할지를 일러 주었다. 그는 연설문을 좀 보자고 했다. 대학을 두루 구경시켜 주고는, 자기를 언제나 마음대로 이용해도 좋다고 확약을 해주고, 반다르카르 박사와의 회견 결과를 자기에게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좋아서 나를 보내 주었다. 정치적인 영역에서 고칼레가, 그의 생존시나 지금이나 내 마음을 점령하고 있었고 또 지금도 차지하고 있는 지위는 완전히 특별한 것이다.

  반다르카르 박사는 아버지 같은 따뜻함으로 나를 받아 주었다. 내가 그를 찾아간 때는 바로 정오였다. 내가 그런 시간에 사람을 찾아야 할 만큼 바쁘다는 그 사실이 바로 이 지칠 줄 모르는 대학자를 감동시킨 바가 많았고, 집회의 회장은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즉시 찬동을 해주었다.  그렇고말고, 그렇고말고 하는 소리가 터지듯이 저절로 나왔다. 내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했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당신은 거절할 수가 없소. 당신의 경우는 참 중대한 것이고, 당신의 노력은 참으로 훌륭한것이니 내가 어떻게 당신 집회에 가담하지 않을 수 있겠소? 틸랙과 고카레에게 의논 하신 것, 참 잘했소. 그들에게 가서 두가지 사바*1의 연합 주최로 열리는 강연회에 내가 기꺼이 사회를 보겠단다고 말씀하시오. 강연 시간을 내게 정하라고 할 필요는 없소. 그들의 형편에 맞게 하면 내게도 맞는 것이오.

 이렇게 말해 주고 감사와 축복으로 나를 보내 주었다.  학식많고 사심 없는 이 푸나의 일꾼들은 아무런 잡음 없이 서로 뭉쳐서 조촐하고 자그마한 장소에서 강연회를 열어 주었다. 나는 기쁨으로 내 사명에 대해 한층 더 자신을 가지고 그곳을 떠났다. 다음으로 나는 마드라스로 갔다. 거기는 열정에 들떠 있었다. 발라순다람 사건이 집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내 연설문은 인쇄되어 있었는데, 내개도 꽤 긴 것이었는데도, 청중들은 그 한마디 한마디를 주의해 듣고 있었다. 강연회 끝에는 언제나 그  푸른 팜플렛 을 팔았다. 나는 두번째의 수정판 1만부를 가지고 나갔다. 책은 뜨거운 호떡처럼 잘 팔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많은 부수를 인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열심에만 쏠려서 책의 수요 부수를 지나치게 계산하였다. 내 연설은 영어를 아는 사람을 상대로 한 것인데, 마드라스에는 그런 사람은 다해도 1만명이 되지 못했다.

  그곳에서 가장 큰 협조를 해준 사람은  마드라드 스태더드 지의 발행인인 파라메슈란 필레이 씨였다. 그는 그 문제를 세심히 연구했고, 이따금 나를 자기 사무실로 불러서는 지도를 해주었다.  힌두 지의 수브라마니암 씨와 수브라마니암 박사도 매우 동정적이이었다. 파라메슈바란 필레이 씨는  마드라스 스탠더드 지의 지면을 나에게 마음대로 쓸 수 있게 제공해 주었고 나는 그것을 자유로이 썼다. 파차이아파 강당에서 열렸던 강연회에서는, 내 기억으로는 수브라마니암 박사가 사회를 해 주었다. 내가 만난 친구들은 모두 내게 애정을 보여 주었고, 또 그 사건에 대해 굉장히 열심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영어로 말할 수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어색한 기분은 없었다. 사랑으로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1. 계급을 초월해서 있는 자치단체. 모임


29. 곧 돌아오다.

  마드라스에서 캘커타로 갔는데 거기서 나는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레이트 이스턴 호텔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데일리 텔레그래프 의 대리인 앨러도르프 씨와 알게 되었는데, 그는 나를 자기가 머물고 있는 뱅골 크럽으로 초대해 주었다. 그는 그때 그 응접실에 인도인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다. 제한이 있는 것을 알자 그는 나를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러한 지방 영국인들의 차별에 대해 그는 못마땅히 여기는 뜻을 밝히고, 응접실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을 미안히 여긴다고 사과룰 했다. 나는 물론  벵골의 우상 인 스렌드라나드 바네르지를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많은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말했다.

  내 생각에는 사람들이 당신 일에 흥미를 가질 것 같지 않습니다. 아시다시피 이곳의 우리들의 어려움도 결코 적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시오. 마하라자*1들의 동정을 얻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국 출신 인도인 협회의 대표자를 만나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리고 또 퍄리모한 무카르지와 마하라자 타고르를 만나 보아야 합니다. 둘 다 개방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고 공공사업에도 상당히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 신사들을 찾아 보았으나 헛탕이었다. 둘 다 아주 냉랭한 태도로 대해 주면서, 캘커타에서 공공집회를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고, 그리고 일이 어떻게 된다 해도 사실상 그것은 수렌드라나드 바네르지에게 달린 것이라고 했다. 일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나는 알았다. 나는 아므리타 바자르 파트리카 신문사를 찾아 갔으나 거기서 나를 만나 준 신사는 나를 떠돌이 유대인으로 알고 있었다.  방가바시 사를 찾아갔더니 그들은 한층 더했다. 편집장은 나를 한시간이나 기다리게 놔 두었다. 그에게는 분명히 많은 면회자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 마치고 난 다음에도 나를 거들떠 보려고도 아니했다. 기다리다 못해 내 편에서 용기를 내어 나의 화제를 끄집어내려 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손쓸 사이가 없는 것을 못보시겠어요? 당신 같은 방문객이 끝이 없습니다.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당신 말씀을 듣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욱하고 화가 치밀기는 하였지만, 나는 곧 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방가바시 지의 명성을 들은 것이 있었다. 끊임없이 방문객이 줄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와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이다. 그의 신문이 다룰 기사거리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남아프리카는 그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당하는 사람 자신에게는 아무리 심각한 불평거리라 하더라도 그는 역시 각각 제나름의 불평을 가지고 편집실을 찾아드는 많은 방문객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편집인들이 어떻게 그들을 다 만나볼 수 있을까? 그 뿐 아니라 불평자들은, 편집인들이 이 나라에서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줄로 상상하고 있지만, 그 힘이란 자기 사무실 문턱 밖을 거의 못 넘어가는 힘이란 것을 그 자신만은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용기를 잃지 않고 다른 신문사들을 계속 찾아다녔다. 전과 마찬가지로 나는 인도에 와 있는 영국인 발행자들도 찾아 보았다. 스테이츠먼 과 잉글리시먼이 문제의 중대성을 알아 주었다. 그들과는 긴 회견을 했고 그들은 전문을 게재해 주었다. 잉글리시먼 의 발행자 사운더스는 나에게 자기 것처럼 여기고 자기 사무실과 신문을 내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 심지어는 그 문제에 관핸 쓴 자기 사설의 교정인쇄를 미리 보내 주면서, 내 마음대로 고쳐도 좋다고까지 했다. 우리 사이에 우정이 자랐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는 가능한 한 나를 돕겠다고 약속했고, 글자 그대로 그는 약속을 이행했으며, 그는 중병으로 눕게 될 때까지 끊지 않고 소식을 보내 주었다.

  일생을 통해서 내게는 고맙게도 그렇게 이루어진 교우가 많은데, 그것은 거의 다 기대도 못했던 데서 갑자기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사운더스 씨가 나를 좋아한 이유는 내가 과장을 하는 일이 없는 것과, 진리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내 목적을 위해 동정하기 전에 내게 속속들이 캐물었다. 그래서 내가 남아프리카의 문제, 특히 백인에 대해서조차도 자기 앞에 될수록 공정한 진술과 평가를 하기 위해 의지와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게 되었다. 내 경험이 보여주는 바에 의하면 우리는 상대방을 공정히 대해 주기만 하면 지체없이 공정한 대우를 받게 된다. 기대하지 못했던 사운더스 씨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어, 어쨌거나 캘커타에서 공공집회를 여는 데 성공하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그때, 더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전보가 왔다.

  의회 1월개회. 급속 귀환 요망.

  그래서 나는 신문사에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캘커타를 떠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띄우고, 곧 봄베이를 향해 떠났다. 떠나기 전에 다다 압둘라 회사 봄베이 출장소로 전보를 쳐서 제일 빨리 떠나는 남아프리카행 선표를 마련하라고 했다. 다다 압둘라는 그때 바로 증기선 쿨랜드 호를 사들인 때였으므로, 나더러 나와 내 가족을 무료로 태워줄 터이니 그 배로 가라고 권했다. 나는 감사하게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 12월 초에 아내와 두아이들과 과부가 된 누이의 외아들을 데리고 두번째로 남아프리카를 향해 떠났다. 또 다른 증기선인 나데리 호가 같은 시간에 역시 더반을 향해 떠났다. 두 배의 승객은 모두 합해서 8백명은 되었을 것이고, 그 중 반은 트란스바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1. Maharaja : 영국 식민지로 있을 때의 지방 군주 칭호 중의 하나. 마하(크다)와 라자(왕)가 합해서 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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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눈물과 미소 - 오영희

 일제의 발악이 한창 심하던 1938년,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남편과 만나 결혼한 이후로 우리는 정말 수없는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왔다. 남편의 정치 생활은 늘 감옥과 연결지어졌고, 덕분에 우리 집은 평균 닷새에 하루는 남편이 없는 쓸쓸한 집이었다. 나와 아이들은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저녁마다 <동심초>와 <별은 빛나고>를 불렀다. 아이들은 우울해 있다가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다시 웃음을 되찾곤 했다. 노래가 끝나면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또 여행을 가셨단다. 며칠 안 오실 거야" 하고 말해 주는 생활이 20년은 계속되었다. 한 번은 교도소에 있는 남편에게  KBS를 통해 내 노래를 보낸 적도 있었다. <꿈길>이란 노래였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도중에서
  만나 볼지고.

  면회조차 허용되지 않던 그때이기에 나는 생각다 못해 노래라도 보내자고 결심한 것이 다행히 취침 전에 재소자들에게 들려주는 방송 시간에  나가게 된 것이다. 남편은 이 노래 사건으로 며칠 동안 감방 친구들에게 즐거운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남편이 감옥에서 풀려 나와 집이라고 찾아왔을 때 우리는 신촌 어느 고아원 방에서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살고 있었다. 비가 오기만 하면 천장에 깡통을 매달아야 하는 오막살이였다. 그  모습에 남편은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큰딸을 리더로 하는 가족 합창으로 남편을 맞이했다. 웃음과 눈물로 범벅이 된 남편의 그때 모습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신이 우리에게 주신 웃음과 늘 노래할 수 있는 마음이 어떤 황금의 재산보다 소중한 것임을 우리 가족은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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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모든 날에 저녁이 오듯이
- 홍윤숙


   아직도 내 뜰에 모란은 피지 않고  

  삼월, 사월, 그리고 오월을 봄이라 했다. 그러나...  그 다음을 그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먼산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도 그 다음을 굳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그 단 두 구절의 말에 너무도 많은 의미, 많은 아픔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봄에 기어이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것이다. 오랜 병상에 있었지만 그래도 행여하고 조바심 치던 아내를 끝내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올 수 없는'나라로 떠나 보낸 것이다.  어쩌다 서두부터 이렇게 어둡고 슬픈 이야기가 시작되었을까. 바로 어제 나는 그 집에 문상을 갔었고 그저께 한식날은 어머니 산소에 성묘를 갔었다. 한 이틀 죽음과 인접해 있다 보니 글조차 이리 어두어지나 보다.  비좁은 한 뼘 뜰에 비비대며 얽혀서 쏟아져 나오던 진달래, 개나리도 끝물로 접어들고 목련도 어느덧 생기를 잃어간다.

그러고 보니 저 꽃들이 제 모습을 있는 대로 자랑하며 피어 있는 시간이란 고작 보름에서 스무날이다. 앵두꽃은 겨우 사흘을 절정으로 하얗게 피었다 스러지기 시작한다. 참으로 그 짧은 개화를 위해 꽃들은 한해를 기다리는 것이다. 한 해를 기다려 불과 며칠을 불사르고 다시 삼백육십 일을 뿌리로 어둠으로 돌아가야 한다.  허망하다든가 아쉽다든가 그런 생각도 이젠 별로 들지 않는다. 그저 아연할 뿐이다. 눈 한번 감았다 떠보면 세상이 달라져 있는데에 놀라울 뿐이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무성한 놀이에 그저 아연할 뿐이다.  긴 겨울 동안 그처럼 봄을 기다리고 기다렸음에도 그 봄을 봄다이 제대로 느끼고 음미할 사이도 없이 매번 놓치고 지내버리는 것은 바로 저 봄의 너무도 빠른 변화, 빠른 걸음새 때문이다. 이 봄도 그렇게 나는 저만치 비켜서서 꽃잎 한 장 제대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지나가고 있다. 날마다 부질없는 일에 쫓겨 뛰어다니고 있다.  그렇게 하루 해를 써버리고 돌아와 보니 먼 외지에 나가 있는 달에게서 편지가 와 있었다. 눈물엔 면역도 없는지 울컥 가슴부터 메었다. 집 떠난 지 14년, 어느덧 30 중반에 접어든 그 아이도 이젠 중년의 나이다. 그럼에도 편지 속의 달은 아직도 열 몇 살의 소녀로 내게 와 울먹인다.

"엄마, 그 뒤뜰의 목련나무 올해도 만발해서 창을 덮었겠지..."  그렇구나, 그 목련나무 꽃핀 것도 나는 제대로 보지 못했구나. 비로소 생각이 나서 뒤뜰에 나서보니 꽃은 어느새 시들시들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그 딸이 여고 2학년 때였던가보다. 심한 봄감기로 며칠을 앓아누웠던 아이가 어느 날 창 밖에 한참 만발한 목련을 바라보다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엄마, 목련꽃을 보고 있으면 꼭 장송곡이 들리는 것만 같다."  나는 그때 "애고, 이상스럽게 왜 하필 장송곡이냐!" 하고 핀잔을 주었지만 이상한 전율로 가슴이 섬짓한 것을 느꼈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허약하던 아이는 대학을 나오자 스스로 집을 떠나 유학을 택했고, 이제 중년이 되어 그곳에 정착하여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내 마음엔 늘 보이지 않는 봇물 하나 터진 듯 그립고 안타까운 정, 병처럼 앓고 있다. 목련꽃은 어느덧 내 마음속에서도 한과 정과 죽음으로 못박혀 갔다. 가 몸서리쳐지도록 요사한 흰빛은 그대로 온갖 정한으로 엉키고 엉켜 차라리 돌처럼 화석해버린 영상 같기만 하고 그 탐스러운 꽃송이들 속에선 이를 데 없이 슬픈 곡성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하여 이렇게 나는 목련꽃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꽃인가 하고 보면 자욱한 구름이고 구름인가 다시 보면 흰 나비떼 앞산 뒷산 흔드는 소리 없는 요령소리 댕댕 울리며 사월의 하는 가득 메운 상여꾼 간다. 어느 지체 높은 청상과부 소복단장하고 한겨울 빈 마당 매섭게 수절하다 그 한 못다 풀어 이 봄에 미치는가 온 장안 마을 골목 하얗게 쏟아지는 낭자한 곡성 오늘도 부끄럽도록 무르익은 계절의 일광이 창 너머 뜰 메우고 있는데 밝을수록 어두운 창 이쪽에선 아직온 추운 겨울 강물이 흐르는 것만 같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하고 노래했던 옛 시인처럼 아직도 내 뜰에 모란이 필 날이 멀어서일까. 마음에까지 봄이 오기엔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그러나 기다리던 모란이 핀다 한들 그리고 그 옆의 작약이 또 핀다 한들 무슨 소용이랴. 결국은 작약도 지고 말 것을. 그리고 다시 삼백예순 날을 "하냥 섭섭해 울 것을." 수십 년 반복해온 이 참담한 시간의 놀이에 나는 더 이상 견딜 기력이 없다. 나이 먹으면 감성도 무디어진다고 하던데 실제로 많은 부분에서 희로애락의 정도 엷어지고 희석되어버린 것 같은데 이상하게 계절의 변화, 시간의 무심한 놀이 앞에서만은 내 감성은 더욱 유리알처럼 예민해지고 허약해져서 감당하기가 힘들다. 생명 있는 것은 마침내 떨어진다는 사실 앞에서만은 내 감성은 잠들지 않고 시들지 않는다. 이윽고 나 또한 져야 하기 때문일까.

 시멘트 바닥에 고인 마알간 물웅덩이를 문득 들여다보니 파란 하늘이 한 조각 떨어져 있다. 오, 그렇구나. 하느님도 이런 봄날엔 사람의 마을이 그리워서 저같이 호젓한 물웅덩이에 내려와 누워 계시는구나. 다시 한 번 들여다보니 파란 하늘 조각 속에 또 하나 낯선 사람의 얼굴이 잠잠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인데 도무지 알아볼 수 없으리만치 나이를 먹어버린 얼굴이다. 누굴까, 저 나이 먹은 여자의 얼굴은. 섬짓하여 돌아서는 나의 등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다. 돌아보니 그쪽은 더욱 가물가물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다. 20년 전의, 20년 전의 나를 닮은 듯한 여자의 얼굴, 저것은 누구일까. 아니, 어디로 갔을까. 그 무성하던 푸른 날은, 내 스무 살은?

 사람을 찾습니다. 나이는 스물 살 키는 중키 아직 태어나던 그대로의 분홍빛 무릎과 사슴의 눈 둥근 가슴 한아름 진달래빛 사랑 해 한 소쿠리 머리에 이고 어느 날 말없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삼십 년 안개 속에 묘연 누구 보신 적 없습니까 이런 철부지 어쩌면 지금쯤 빈 소쿠리에 백발과 희한 이고 낯설은 거리 어스름 장터께를 해매다 지쳐 잠들었을지도 연락바랍니다 다음 주소로 사서함 추억국 미아 보호소 현상금은 남은 생애 전부를 걸겠습니다.(졸작 "사람을 찾습니다")  이렇게 애타게 찾아보지만 그날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윽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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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포리스트 카터


  내 이름은 작은나무

  아빠가 세상을 뜨신 지 일년 만에 엄마도 돌아가셨다.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이때 내 나이 다섯 살이었다. 나중에 할머니에게 듣기로는 엄마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고아가 된 나를 놓고 친척들 사이에서 꽤 시끌벅적한 말다툼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가족들이 그때까지 살던 통나무집은 언덕 중턱에 있었다. 친척들은 작은 개울이 흐르는 그 뒤뜰에  머리를 맞대고 서서, 내가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열심히 입방아를 찧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안되는 재산이긴 하지만, 그 와중에도 페인트칠이 된 침대와 탁자, 의자 따위를 나누어 가지면서 말이다. 할아버지는 친척들 틈에서 벗어나 뜰 구석에 묵묵히 서 계셨다. 할머니도 할아버지 뒤에 가만히 서 계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체로키족(미국 남동부의 애팔래치아 산맥 남쪽 끝에 살면서 농경과 수렵생활을 한 수렵 인디언. 1838~1939년에 오클라호마주로 강제이주당했지만, 산속으로 숨거나 달아난 사람들도 있어서, 지금은 멀리 떨어진 두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작은 나무는 본래의 고향인 테네시주에 머무른 그룹의 자손에 속한다-옮긴이)의 피가 반 섞인 혼혈이고 할머니는 순수 체로키족이시다.

  할아버지는 거의 2미터가  다 될 정도로 키가  커서 사람들 사이에 서면 머리 하나가 삐죽 솟았다. 거기다 할머니는 땅만  내려다보고 계셨지만 할아버지는 사람들 머리 너머로 계속 내 얼굴을 쳐다보고  계셨다고 한다. 큼지막한 모자를 쓰시고, 교회 갈 때나 장례식 때만 입는 검은 양복을 입으신 채 말이다. 나는 한발한발 뜰을 가로질러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가 그 긴 다리에  매달렸다. 친척들이 떼놓으려 해도 부둥켜안은 손의 힘을 풀지 않았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울지도 않고 고함도 지르지 않고,  오직 할아버지 다리만 꼭 부둥켜안고 있었다고 한다. 친척들은 떼내려 하고 나는 떨어지지 않으려 하면서 한참 동안 실랑이를 벌이고 있노라니, 할아버지가 가만히 몸을 굽혀 내 머리 위에 손을 얹어놓으시고는,
  “그냥 내버려둬.”
  라고 하셨다. 그러자 친척들이  일제히 내 몸에서 손을 뗐다. 할아버지는 좀체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어쩌다 한마디 하시면 누구도 그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는 게 할머니의 설명이셨다.

  그날 오후 늦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나, 세사람은 언덕을 내려와 마을로 이어지는 큰길로  나왔다. 한겨울이라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내 옷가지를 싼 보따리를 어깨에 짊어진  할아버지가 길섶을 따라 앞서 걸으셨다. 나는 얼마 안 가 할아버지를 따라잡으려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 뒤에서 따라오시던 할머니도 자주 치마를 들어올리면서 잰걸음으로 걷고 계셨다. 마을에 들어서고 나서도 우리의 이런 행진은  그대로 이어져, 할아버지는 여전히 저만큼 앞서  걸으셨다. 할아버지를 간신히 따라잡은 것은 버스 정류장에 들어서고 나서였다. 우리는 한참  동안 그곳에 서 있었다. 할머니는 버스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버스 앞쪽에 걸린 행선지 표지판을 일일이  읽어보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누구보다도 글자를 잘  읽는다고 하셨다. 과연 할머니는 우리가 탈 버스를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집어내셨다. 어느새 주변에는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버스에 올라탈 때까지 기다렸다. 그건 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버스에 발을 올려놓는 바로 그 순간부터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올라타시고, 그 다음에 나, 할머니는 차문 바로 안쪽 제일 낮은  승강구 계단에 서 계셨다. 할아버지가 바지  앞주머니에서 물림쇠가 달린 지갑을 꺼내 버스 요금을 내려 했다.
  “차표는 어디 있는 거요?”
  운전사가 어찌나 크게  고함을 질렀던지,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  모두가 한꺼번에 우리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래도 할아버지는 눈 한번 깜짝이지 않고, 지금 차비를 내려는 참이라고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내 어깨너머로 “어디로 가는지 말해요.”하고 속삭이셨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시킨대로 운전사에게 말했다.  운전사가 얼마를 내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동전 하나하나를  찬찬히 살펴보면서 돈을  세어나갔다. 차안의 불빛이 워낙  흐렸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운전사가 손님들에게 얼굴을 돌리더니, 오른손을 들어 보이고는 “하여간 못 말려!”라며 웃음을 터뜨렸다. 승객들도 모두 따라 웃었다. 사람들이 웃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우리가 차표가 없다고 해서 크게 악의를  품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버스 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웬 아주머니가 눈에 띄었다. 그 아주머니는 많이 아픈 것 같았다. 눈언저리는 온통 푸르죽죽한 멍이 들었고, 입가에는 시뻘겋게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우리가 곁을 지나치려 하자 아주머니는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가 금방 도로 떼면서 큰 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야 ... 푸우 !”
  하지만 웃는 걸 보니 아픈 건 금새 사라진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따라 웃었다. 아줌마 옆에 앉았던 아저씨도  자기 넓적다리를 손바닥으로 두들기면서 웃어댔다. 그 아저씨는 굵고 번쩍거리는 넥타이핀을 꽂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부가 부자이고, 필요하면 언제라도 의사에게 치료받을 수 있는 사람들인 걸 알았다.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이에 앉았다. 할머니가 손을 뻗어 할아버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할아버지도 내 무릎 위로 손을 뻗어  할머니 손을 가만히 잡았다. 편안하고 따뜻한  기분이 내 몸을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그래서인지 나는 금방 잠이 들었다. 버스에서 자갈길로 내려섰을 때는 밤이 한창 이슥해서였다. 할아버지가 다시 걷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뒤를 따랐다. 유리가 쨍 하고 깨질 것처럼 공기가 차가웠다. 둥그런 수박을 반으로 쪼개놓은 듯한 달이 얼굴을 내밀고, 저 멀리 구부러져 돌아간 곳까지 우리 앞길을 은빛으로 비춰주었다.

  자갈길을 벗어나, 가운데로는  풀이 자라고 양옆으로 마차의  바퀴자국이 선명한 흙길로 들어서자 산이 바로 내 옆에 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이때 우리는 시커먼 산그림자 속에 들어가 있었다. 반달은 높은 산등성이 바로 위에 높다랗게 걸려 있어서, 올려다보려면  머리를 완전히 뒤로 젖혀야 했다. 나는 시커멓게 덮쳐누르는 듯한 산의 무게에 몸을 떨었다. 할머니가 내 뒤에서 소리쳤다.
  “웨일즈, 얘가 지친 것 같아요.”
  할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할아버지의 얼굴은 널따란 모자 그늘에 가려 있었다.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는 녹초가 될 정도로 지치는 게 좋아.”
  할아버지는 이렇게 한마디 하시고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하셨다. 하지만 이번에는 따라잡기가 훨씬 쉬웠다. 할아버지가 걷는 속도를 늦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도 지쳤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걸어가자 바퀴자국이 난 널찍한  길도 끝나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은 산길로 들어섰다. 언뜻 생각으로는 우리가  산을 짓밟으면서 앞으로 나갈 것  같았는데, 실제로 걸어보니 산이 손을 벌려  온 몸으로 감싸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자국소리가 조금씩 울리기  시작했다. 주위에 뭔가 꿈틀거리는 것들이 있었다. 만물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작은 휘파람소리와 숨소리들이 나무들 사이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춥지는 않았다. 길옆에서는 달랑거리는 소리와 깐닥거리는 소리, 술렁이는 소리들이 뒤섞여 흘러갔다. 바위 위를 굴러내려오면서 멈추는  곳마다 여울을 만들고, 다시 굴러 내려가는 시냇물 소리였다. 이제 우리는 깊은 계곡 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느새 반달은 맞은편 산등성이 뒤에  숨은 채 뿌연 은빛만을 하늘 가득히 토해내고 있었다. 덕분에  계곡에는 회색빛 아치 같은 것이 드리워져 우리 모습을 희미하게 밝혀주었다. 할머니가 뒤에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인디언 노래였다. 굳이 가사를 붙여 부르지 않아도 어떤 노래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듣고 있노라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갑자기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길고도 구슬픈듯한 울음소리가 오열하는 듯한 긴  여운을 남기고 울려퍼지면서 산속으로 도로 사라져갔다. 할아버지가 쿡!하고 웃으셨다.
  “저건 모드라는  놈이야. 코로 냄새를  맡지 못하니까 귀로  어떻게 해보려는 거지.”
  잠시 후 우리는 여러 마리의 개들에게 둘러싸였다. 개들은 할아버지 주위에서 낑낑거리기도 하고, 처음 보는 내 냄새를  맡으려고 킁킁거리기도 했다. 모드가 짖는 소리가 또 들렸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웠다. 할아버지가 “그만 해! 모두.”하고 소리지르자, 그 소리 임자가 누군지 알아챈 모드는 쏜살같이  달려와 우리에게 뛰어들었다. 그리 넓지 않은 개울 위에 걸쳐진 통나무다리를 건너고 나니 조그만 오두막집이 있었다. 그 집은 산을 등지고 서  있었는데 앞쪽으로는 기다란 베란다가 시원스럽게 뻗어 있었고, 뒤쪽으로는 커다란 나무들이 서 있었다. 오두막집 가운데로는 약간  폭이 있는 마루가 있었고, 그 양옆으로  방들이 있었다. 마루 양끝은 그대로  바깥으로 통하게 되어 있었다. 그것을 마루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산사람들은 `개통로`라 불렀다.  개들이 주로 그곳으로 들락거렸기 때문이다. 이 마루를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부엌 겸 식당  겸 거실로 쓰는 커다란 방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침실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쓰는 침실이었다. 남은 하나를 내 방으로 쓰기로 했다.

  히코리 나무로 만든 테두리에다 사슴 가죽을 잘 묶어서 만든 침대는 부드럽게 쿨렁거렸다. 침대에 누우니 열린 창문으로  개울가에 서 있는 나무들이 희미한 빛속에서 귀신처럼 시커멓게 보였다. 울컥 엄마 생각이 나고, 낯선 곳에 와 있다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때 누군가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침대 옆 마룻바닥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널따른 치마자락을 마루에 펼치고, 흰머리가 많이 섞인 땋은 머리를 어깨에서  무릎으로 늘어뜨리고 앉아 계셨다. 할머니도 나처럼  창 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이윽고 할머니가 낮고 부드러운 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숲도, 가지를 스치는 바람도,
  이젠 모두 그가 온 걸 알지.
  아버지 산이 노래불러 맞아준다네.
  아무도 작은 나무를 무서워하지 않아.
  작은 나무가 착한 걸 아니까.
  모두가 소리 높여 노래하지.
  “작은 나무는 외톨이가 아니야.”
  장난꾸러기 라이나도
  졸졸졸졸 물소리 울리며
  즐겁게 춤추며 산을 내려간다네.
  “내 노래 들어봐요.
  우리 형제가 찾아왔어요.
  작은 나무는 우리 형제,
  작은 나무가 여기 있어요.”

  어린 사슴 우스디도
  메추라기 미네리도
  까마귀 가그까지 노래부르네.
  “작은 나무는
  상냥하고, 강하고, 용감하다네.
  작은 나무는 절대 외톨이가 아니야.”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면서 몸을 천천히 앞뒤로  흔들었다. 그러자 나도 바람이 재잘거리고, 시냇물 라이나가 내 이야기를 노래부르며 형제들에게  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노래 속의 작은 나무(저자 포리스트 카터의  인디언 이름-옮긴이)가 바로 나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산 형제들이 날 좋아하고 나하고 같이  있고 싶어하는 걸 보니 기뻤다. 그래서 나는 울지도 않고 편안하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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