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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어느 사랑 이야기 - 작자 미상

  사랑은 당신이 받고자 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사랑은 오직 당신이 주고자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 캐더린 햅번

  만년설을 이고 선 히말라야의 깊은 산골 마을에 어느 날  낯선 프랑스 처녀가 찾아왔다. 그녀는 다음날부터 마을에 머물면서 날마다 마을 앞 강가에 나가 앉아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렸다. 달이 가고 해가 가고, 몇십 년이 흘러갔다. 고왔던 그녀의 얼굴엔 어느덧 하나둘 주름살이 늘어 갔고 까맣던 머리칼도 세월 속에 희어져  갔지만 속절없는 여인의 기다림은 한결 같았다.
  그러던 어느 봄날, 이제는 하얗게 할머니가 되어 강가에 앉아 있는 그녀 앞으로 상류로부터 무언가 둥둥 떠내려 왔다. 그것은 한 청년의 시체였다. 바로 여인이 일생을 바쳐 기다리고 기다린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청년은 히말라야 등반을 떠났다가 행방불명이 된 여인의 약혼자였다. 그녀는 어느 날인가는 꼭 눈 속에 묻힌 약혼자가 조금씩 녹아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 떠내려 오리라는 걸 믿고 그 산골 마을 강가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할머니가 되어 버린 그녀는 몇십 년 전 히말라야를 떠날 때의 청년 모습 그대로인 약혼자를 껴안고 한없이 입을 맞추며 울었다. 평생을 바쳐 마침내 이룩한  사랑. 어디 사랑뿐인가. 쉽사리  이루기를 바라고 가볍게 단념하기를 잘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아름다운 슬픈 이야기이다.



    사랑은 기적을 낳는다 - 서정주

  나는 중학교 2학년 여름에 지독한 열병인 장티푸스에 걸렸다. 서울의 내 하숙을 찾아오신 아버지를 따라 나는 그때 우리 집이 있던  전라북도 줄포라는 곳으로 공부도 중단하고 내려가야만 했다. 시골의 일본인 의사는 나를 다시 진찰해 보고는, 딴 사람한테 전염시키지 않도록 나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격리 병원으로 즉시 옮기게 했다. 가족 중 누구 하나 따라가서  병간호를 하는 것까지는 인정상  말리지 않았으나, 그 따라간 사람도 한 번 집을 나서면 거기서 나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다. 어머니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나와 생사를 같이할 양으로 죽을지 살지 모르는 나는 홀로 따라오셨다.

  장티푸스라는 병은 지금은 비교적 고치기 쉬운 병이지만, 1920년대 말인 그때만 해도 일본의 의학 수준이 열악해 한 번 걸리면  고치기 힘든 병이었다. '염병 3년에 땀도 못 내고 죽을 놈' 같은 욕설 그대로 염병이라고 불리는 이 장티푸스는 매우 치사율이 높은 죽음의 쇠망치를 든 염라대왕의 사신이었던 것이다.

  격리 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동안 내 열은 점점 더 치솟아  나는 옆에 계신 어머니까지도 몰라보게 되고, 늘 하늘 속을 피터팬처럼 날다가 흉악한 악마를 만나 목을 줄리거나 날카로운 낫으로 협박당하는 고된 환각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어느 때는 옆에 와서 찬물 베개를 갈아 넣어 주는 어머니를 악마로 보고 소리소리치며 대들기도 했다.  마침내 어느 날 일본인 공의는 이런 나를 와서 다시 진찰해  보곤 이젠 살 가망이 없다고 마지막 선고를 내렸다. 아버지는 의사의 선고를 듣고 조그만 꽃상여를 준비하라 이르고, 자기는 곧 살림을 작파하고 집을 떠나겠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긴긴 기도를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일정한 종교가 없으셨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종교의 신을 향해서가 아니라 그냥  무턱대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이 애를 살리시고 나를 대신 데려가소서!"

  이 기도는 낮 동안에는 어머니의 마음속에서 계속되다가, 밤이 깊으면 흰 사발의 정화수에 담기고, 그 앞에 꿇어 엎드리는 당신의 절  속에 담겼다. 궂은 날이나 맑은 날이나 이 일은 날마다 계속 되었으며, 그 동안은 잠도 거의 없이 지내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한결같으신 정성으로 한  순간도 빈틈없이 내 곁을 지키며 찬물 베개와 찬 물수건을 갈아대시고, 미음을 쑤어 먹이셨다. 그래서 기적처럼 나는 서너 달 만에 나아  다시 성한 사람이 되었다. 내 회복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그 무턱대고 한 기도의  힘과, 그 기도의 힘에 맞추어 빈틈없이 갈아댄 찬물 베개와 찬 물수건 덕분인 줄을 이제 나는 안다. (시인 서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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