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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pressian.com/article/author_article_list.asp?article_num=60100319002923&Page=1&make_person=김기협
'실존주의'에 대한 조반, 사르트르의 '현존주의'
[철학자의 서재]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중국 문화대혁명, 그 모순된 다면성

'철학자의 서재' 꼭지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서 이런저런 생각 끝에 최근 아주 재미있게 틈틈이 읽고 있는 천이난이라는 중국인이 쓴 <문화대혁명, 어느 조반파 노동자의 문혁 10년>(장윤미 옮김, 그린비 펴냄)에 대해 쓰리라 마음먹었다.

철학하는 인간들도 세상사 돌아가는 것에 관한 특히 첨예한 문제들에 대해 제법 다양하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다소 '선정적인' 책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자그마치 840쪽에 이르는 분량인데 원고 마감이 된 시점에 겨우 520여 쪽밖에 읽지 못했다. 이런! 준비가 안 된 것이다. 하지만 준비 안 된 이야기나마 이렇게 하게 된다.

문혁은 모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온갖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자본주의를 발본색원하여 공산주의를 완성하려는 이념을 실현하려는 것이 마오쩌둥으로의 권력 집중과 결합되어 있고, 마오쩌둥의 우상화와 인민들의 목숨을 건 자발성이 결합되어 있고, 이른바 당 중앙지휘와 각 지방 행정 체제의 무정부주의적인 해산이 결합되어 있고, 대대적으로 확산되는 인민들의 자유와 인민들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공포의 확산이 결합되어 있다.

문혁을 대표하는 낱말이 있다면, 기존의 권위를 거부하는 혁명적 실천을 통칭하는 '조반(造反)'일 것이다. 놀란 일 중의 하나는 '조반'을 주도하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이 해당 지역의 군부마저 좌지우지하면서 서로 세력 다툼을 하는 가운데, 누구나 총기를 소지할 수 있고 심지탱크까지 동원하는 강력한 무장 투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반 세력들 간의 무장 투쟁에서 황당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양쪽 모두 마오쩌둥을 '신'처럼 여겨 추종한다는 점이다. 투쟁의 명분과 기준이 마오쩌둥의 애매한 지시를 어떻게 달리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그에 따라 목숨을 건 투쟁이 수행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그야말로 인민들의 신으로서 인민들 간의 목숨을 건 투쟁을 요모조모로 통제하면서 심지어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필자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 정치적이거나 역사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정확한 입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문혁에서 내세운 최종적인 기치인 반자본주의는 결국 온 데 간 데 없고 어떤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욱 잔인한 자본주의 사회가 되어 세계적으로 위세를 떨치는 오늘날의 중국을 보면서 중국인들에게 겹겹이 중첩된 모순된 의식들이 배어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뿐이다.

그래서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야말로 청춘을 바쳐 온존하는 자본주의의 기미들을 발본색원하고자 노력했던 숱한 문혁의 주인공들이 오늘날 갖는 감회는 과연 어떤 것일까? 사실 이것이 궁금한데, 이 대목에 관해서는 적어도 700쪽은 넘어가야 나올 것 같은데, 아직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아뿔싸! 이런! 하고서 자탄을 금치 못하는 원고 마감의 상황에 갇혀버린 것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인가?

그래서 '에잇! 포기하고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이야기를 하자' 하고서 마음을 바꿔 먹었다. 독자들이여 용서하시길. 필자는 2009년 1월 초부터 현재까지 시민대안학교인 (사)철학아카데미에서 이 책에 관해 강의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 역시 다 읽지 못했다. 원서로 전체 쪽수가 670쪽에 달하는데, 현재 570여 쪽까지만 강의의 진도가 나간 상태다. 여러 이야기가 떠오르지만 여건상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사르트르는 이른바 '실존주의'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글을 통해 독자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르트르의 철학 내지는 존재론에 대해서만큼은 '실존주의' 혹은 '실존 철학' 따위에 들어 있는 '실존'(實存)이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실존'이라고 번역되는 원어는 'existence'다. 이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통해 제시한 'Existenz'에 대한 번역어인 양 여겨지기 쉽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하이데거의 철학에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흔히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말하는 'existence'는 하이데거가 말하는 'Existenz'와는 크게 다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Existenz'는 '실존'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실존'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대략의 의미는 '자기 존재를 자신 외의 그 어떤 존재자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제 스스로 결단하여 만들어 감으로써, 스스로에게 고유한 양식 속에서 확보한 자유로운 진정한 나 자신'이라는 것인데, 하이데거의 'Existenz'야말로 바로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장 폴 사르트르(1905~1980년). ⓒwikipedia.org

실존주의의 죽음

한때 "실존 철학은 극복되어야 한다"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1970년대 들어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를 위한 노력들이 새로운 사회주의적인 체제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과 맞물려 돌아갈 때, 실존 철학 내지 실존주의는 자신의 세계에 자폐되어 있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한 형태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존주의'라는 말에는 이중적으로 갈래지는 함의가 들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박정희의 독재에 의거한 전일적이고 획일적인 전체주의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개인의 결단과 그에 따른 자유의 획득이라고 하는 비타협적인 저항성을 담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박정희의 전체주의의 정치경제학적인 바탕은 자본주의이고 자본주의는 철저히 개인주의에 입각한 것인데 철저히 개인성에 입각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를 암암리에 방기 내지는 심지어 옹호한다고 하는 순응적인 타협성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실존'이라는 말은 자폐적인 소영웅주의에 불과한 것으로 거의 결론이 나버렸다. 1987년 이후 일정하게 법적·형식적 차원의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실존 철학 내지 실존주의는 어느새 그야말로 자폐성을 면하지 못하는 것으로 '용도 폐기'된 식물 상태가 되고 만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를 더욱 부추긴 것은 1980년대 후반부터 슬그머니 들어와 1990년대 들어 크게 힘을 발휘하게 된 포스트모더니즘과 이를 뒷받침하는 포스트구조주의의 득세였다. 대체로 일군의 프랑스 철학자들로 구성된 포스트구조주의는 그 바탕에 구조주의를 깔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 구조주의는 1950년대 들어 왕성해지는데, 그 출발점은 사르트르의 이른바 '실존주의'에 대한 거부였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과도하게 개인적 주체에 중심을 두고서 일체의 의미들을 주체 중심으로 재구성해 나가는 것으로 해석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주체 대신에 구조를 내세워 구조 내에서 주체가 어떤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주체가 전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이 구조주의의 핵심 주장이었다.

이런 구조주의적인 생각이 '철퇴'를 맞은 것이 바로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급격한 시점을 넘어가고 있을 즈음인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일어난 이른바 '5월 사태'이다. 이때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마오쩌둥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인민의 대대적인 욕망을 보았고, 그 욕망의 주체를 기반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구조주의가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환한 것이다.

다시 되돌아가 말하자면,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한 구조주의적인 독법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뭉뚱그려 말하면, 그래서 틀렸다. 예컨대 사르트르 철학적 인간학에서 기반을 이루는 것은 자유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말하는 자유는 구속이나 예속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사르트르는 "상황 속에서만 자유가 있을 뿐이고, 자유에 의해서만 상황이 있을 뿐이다"(원서 534쪽)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자유를 중지할 자유가 없다"(원서 484쪽)라고 말한다.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이상 이미 늘 근원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고, 이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주체는 이미 늘 자유로운 주체이지,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야 하는 그런 주체가 아니다. 달리 말하면, 자유로운 주체는 욕망의 근원적인 분출 지점일 뿐이다.

사르트르의 현존주의, 그 건재함

사르트르에서 자유는 인간의 'existence'가 성립하는 이른바 대자(對自, pour-soi)의 근본적인 존재론적인 성격이다. 대자라는 것도 인간인 이상 대자가 아닐 수 없는 그런 의미에서의 대자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독자들을 괴롭히기로 감히 마음을 먹는다. 용서해 주시길!

사르트르는 인간 존재가 성립하는 데에는 그 바탕에 시간문제가 깔려 있다고 본다. 그가 말하는 'existence'는 '지금'(現)이라는 특수한 시제(時制)가 지닌 기묘한 성격을 생각함으로써 접근할 수 있다. '지금'은 '지금!'이라고 말하면서 지정하려는 순간에 다른 '지금'이 되고 만다. 간단히 말하면, '지금'이라는 말로써 지칭할 수 있는 정확한 시점(時點)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자신을 벗어나거나 넘어서버리는 것이 '지금'이다.

'existence'는 라틴어로 보면, 'ex+sistere'다. 여기에서 'ex-'는 '…밖에' 혹은 '…너머'이고, 'sistere'는 '자리를 잡다'이다. 말하자면, 'existence'는 '자기의 너머에 자리를 잡음' 혹은 '자기의 너머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이를 철학사의 전통에서는 '본질'과 대립하는 '현존'(現存)이라고 한다. 흔히 '실존'이라고 번역하는 바 사르트르가 말하는 'existence'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현존'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르트르가 말하는 '현존'은 '탈자적'(ek-statique)인 것이다. 탈자적이라는 것은 한 순간도 자기 자신으로 동일하게 있을 수 없고, 오히려 근원적인 차이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해 가장 유명한 명제는 아마도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일 것이다. 이는 불어 원어로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이다. 이 문장은 "현존은 본질에 앞선다"로 번역해야 옳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이 문장은 비단 인간 존재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본질은 플라톤의 이데아 내지는 형상(eidos)과 직결되어 있다. 여기에서 '본질주의'가 나오고, '보편 중심주의'가 나오고, '동일성 중심의 철학'이 나온다. 사르트르가 이 명제를 통해 주창하고자 했던 것은 본질은 지금·여기의 구체적인 현존에 비해 파생적·부차적이고, 보편자는 지금·여기의 개별자에 비해 파생적·부차적이고, (자기)동일성은 지금·여기에서의 차이에 비해 파생적·부차적이라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현존'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적용될 수 있는 것이고, 그 와중에 인간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데, 다만, 인간의 '현존'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각 '현존'이 성립하는 데 근본적인 바탕이 된다. 그러나 사르트르 철학에서 결코 놓쳐서 안 되는 것은 즉자(즉자, en-soi)다.

즉자는 결코 '현존'하는 것이 아니다. 즉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바탕에서 관통하고 있는 근본이다. 사르트르는 이 즉자를 진정한 존재(être)로 본다. 그리고 대자를 바탕으로 한 일체의 '현존'은 즉자에 비해 또 다시 파생적·부차적이라고 본다. 사르트르의 평전을 쓴 앙리 레비가 사르트르를 일컬어 20세기 최고의 유물론자라고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아무튼 이제 사르트르의 철학에 대해 'existentialism'이라고 할 때, 그것은 '실존주의'가 아니라 '현존주의'인 것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현존주의'는 일체의 본질주의를 바탕에서부터 거부하고, '천상'으로 향한 본질적인 영원을 거부하면서 우리 자신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바탕에서부터 떠받치고 있는 '지하'로 향하는 하강의 철학인 것이다.

사르트르의 하강의 철학인 '현존주의 철학'은 지금 우리의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현존주의 철학'이야말로 여전히 긴급하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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