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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속살 - 천소영
 



     경주와 남산 - 서라벌의 탄생 신화


  2천 년도 더 된 아득한 옛날 이야기다. 한반도에서 태양이 가장 먼저 비치는 동쪽의 서라벌, 이 신천지를 찾아오는 부부신의 발걸음이 있었다. 남신은 검붉은 얼굴에 울퉁불퉁 근육이 솟아 있었고, 여신은 부드러운 얼굴에 가냘픈 몸매의 소유자였다. 서라벌은 동방의 새로운 땅이라는 뜻을 가졌다. "서라"는 동쪽이나 새것을 나타내고 "벌"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마을을 나타낸다. "서라"에서 "ㄹ" 이 줄면 "새" 또는 "서"가  되고, "벌"이 변하면 "을" 또는 "울"이 된다. 신라라는 나라 이름은 새벌을 한역한 것이고 서울 역시 이 새벌의 변화음이다. 동방의 신천지는 넓고 아름다운 땅이었다. 살 만한 땅을 찾아 헤매던 두 신이 이곳에서 발걸음을 멈추려는 순간이었다.

  "우야꼬, 저기 사람 같은 산이 걸어온데이!"

  남천 가에서 빨래하던 원주민 처녀가 거대한 두 신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만약 그 처녀가 "산 같은 사람"이라 말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사람 같은 산"이라는 표현에 문제가 있었던지 두 신은 그 자리에서 굳어져 말 그대로 산이 되고 말았다. 경주벌에 우뚝 솟은 두 산, 곧 남산과 망산이 바로 그 흔적인데, 전자가 험준하고 후자가 부드러운 산세를 가지게 된 것은 이들이 부부신의 변신이기 때문이다.

  경주벌에서 일어선 신라 천년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반도에서 최초로 단일 민족국가를 세운 나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남산의 억센 힘과 망산의 우아하고 섬세한 여성다움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남녀 두 신이 정착한 서라벌에는 그 후 기라성 같은 전설의 인물들이 사방에서 몰려온다. 북방 또는 남방으로부터, 하늘 또는 바다로부터 몰려온 이들은 각기 기묘한 탄생설화를 낳으면서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한다. 신라의 시조가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붉은 알을 깨고 나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표주박 같은 알에서 태어났기에 "박"을 성으로 삼고, 그 밝은 빛으로 온 누리를 다스릴 만하다고 하여 밝은 누리 곧 "밝은  뉘(혁거세)"를 이름으로 삼았다. 출생 당시 아이의 몸을 씻었다는 우물, 나정은 지금도 남산  밑 해묵은 소나무 숲에 포근히 안겨 그날의 전설을 들려 준다.

  나정 부근에는 또다른 유적인 포석정이 있다. 두 유적 사이는 고작 1Km  남짓인데 이 짧은 거리에 한 나라의 생성과 소멸에 이르는 천년 세월이 가로놓여 있다고 생각하면 결코 짧게 느껴지지 않는다. 탈해 이사금의 탄생과 이후의 행적은 혁거세거서간보다 더 화려하다. 다파나국이라는 미지의 땅, 역시 알에서 태어난 탈해왕이 궤짝에 실려 동해안에 상륙하고, 어부로 지내다가 묘한 꾀로 반월성의 주인이 되고 또 사후에 토함산의 산신이 되기까지 그의 전생애는 모두 전설 아닌 것이 없어 보인다. 석탈해라는 이름부터 결코 예사롭지 않다. 태어날 때  까치가 울었기에 "까치 작"에서 새(조)가 떨어져 나간 석이 성이 되었고, 탈해 또는 토해라는 이름은 그가 사후에 묻힌 토함산의 기원이 되었다. 이사금이라는 왕칭어도 그가 남보다 이가 많았기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어떻든 토함산 석굴암 앞에서 맞는 일출은 언제 보아도 그의 생애만큼 신비스럽다.

  탈해이사금 시절 박, 석과 함께 또 하나의 성 김씨가 역시 알을깨고 탄생한다.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시림이라 불리는 숲에서 닭 울음소리와 함께 금빛 찬란한 궤짝에서 태어난 것이다. 경주 남천이 휘감아 흐르는 반월성 서편의 느티나무와 왕버들 숲이 무성한 계림은 경주 김씨의 탄생설화를 간직한 곳이다. 다파나국이나 나정, 계림의 이 신비로운  탄생설화가 있었기에 세 성씨가 서라벌을 다스릴 수 있었고, 그 역사가 천년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경주 시내 한복판의 노송으로 뒤덮인 낭산은 언제 가 보아도 정겨운 뒷동산을 연상케 한다. 그 옛날 구름 속에 누각의 영상이 어리고 야릇한 향기가 피어 올랐기에 신유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신유림의 정상 도리천에 대단한  여걸 선덕여왕이 잠들어 있고, 그 턱  밑에 사천왕사 절터가 잡초 속에 버려져 있다. 황량한 사천왕사지를 돌아보려면 아무래도 황혼녘이나 달  밝은 한밤중이 제격일 듯하다. 해질 무렵 이 절터에서 낭산의 숲을 바라보면 이곳을 왜 신유림이라 칭했는가를 알게 된다. 뿐인가, 달 밝은 밤에 피리소리 하나로 지나가는 달을 멈추게 했다는 월명스님(월명사)과 거문고로 방아소리를 흉내냈다는 위대한 풍류객 백결 선생을 만나는 행운도 얻기 때문이다.

  "제망매가"와 "도솔가"의 작가로 알려진 월명사는 이곳 사천왕사에 머무르면서 사랑하는 누이동생의 죽음을 슬퍼했고, 달밝은  밤이면 월명로에 나와 앞마을 월명리를 향해 피리를 불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피리소리도, 인근 마을에 사는 백결 선생의 거문고 가락도 들을 수가 없다. 단지 사천왕사지를 가로지르는 철로와 경주, 울산간 국도의 자동차 소음만이 요란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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