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누리
우리말인데도 가끔 일본말인 것으로 오해되는 낱말들이 있다. ‘에누리·야마리·야코·구라’ 등이 그런 말이다. 글자에 받침이 없고 자음, 모음으로 이어지는 음운 구성이 흡사 일본말 같아서 그런 오해가 생기는 듯하다.
‘에누리’는 본뜻에 새로운 뜻이 보태진 말이다. 이른바 ‘말뜻 확대’가 일어난 말이다. 본래는 ‘물건값을 받을 값보다 더 많이 부르는 일’이 ‘에누리’였다. 그러니까 물건을 파는 쪽의 행위였다. 그런데 이 말에 ‘값을 깎는 일’이란 뜻이 보태졌다. 행위자도 물건을 파는 쪽에서 사는 쪽으로 바뀌었다. 한 낱말이 거의 반대의 뜻을 함께 품고 있는 것이다. “물건을 살 사람이 에누리할 것을 생각해서 물건을 팔 사람이 먼저 에누리를 한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다.
사전은 두 뜻을 함께 올려놓았지만, 언어대중은 본뜻으로는 거의 쓰지 않고 보태진 뜻, 즉 ‘값을 깎는’ 뜻으로 쓰고 있다. 본뜻은 사전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사전에서도 추방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되면 본뜻은 없어지고 보태진 뜻으로만 쓰이므로 ‘말뜻 바뀜’(어의 전성)이라고 해야겠다.
그러나 새 뜻으로 단장한 ‘에누리’도 생존 환경이 그리 녹록지 않다. 언제부턴가 나타난 ‘디스카운트’라는 외래어에 목이 눌리더니, 이제는 ‘디시’(DC)라는 축약어에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우재욱/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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