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와 설미
우리 토박이말에는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는 일에 쓸 낱말이 모자라 그 자리를 숱하게 중국 한자말로 메운다. 이런 형편은 우리말이 본디 그렇게 돼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머리를 써서 이치를 밝히고 올바름을 가리는 일을 맡았던 사람들이 우리말을 팽개치고 한자말만 쓴 까닭이다. 마음이 있으면 말은 생기는 법인데 그들은 우리말에 마음을 주지 않았다. ‘슬기’와 ‘설미’는 그런 역사를 뚫고 이치를 밝히며 올바름을 가리면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토박이말이다.
‘슬기’는 임진왜란 뒤로 가끔 글말에 적힌 덕분에 무서운 한자말 발길에 짓밟히면서도 살아남아 우리 품까지 안겨왔다. 아직도 ‘슬기’보다는 ‘지혜’를 즐겨 쓰는 이가 많지만 국어사전들이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달으며 사물을 처리하는 방도를 옳게 잘 생각해내는 재간이나 능력”이라고 뜻풀이를 똑똑히 달아 올림말로 실어놓아서 갈수록 널리 쓰일 것이다.
‘설미’는 15세기 끝 무렵에 엮은 〈악학궤범〉에 한 차례 글말로 적힌 바가 있지만 여태 국어사전에는 오르지 못한 말이다. 다만 ‘눈’의 매김을 받으면서 ‘눈썰미’로만 국어사전에 올라 있을 뿐이다. 하지만 ‘설미’는 “이런저런 사정을 두루 살펴서 올바르고 그릇된 바를 제대로 가늠하는 마음의 힘”이라는 뜻을 지닌 빼어난 우리 토박이말이다. 악학궤범에는 나쁜 것을 쫓는 서낭 ‘처용’의 모습을 추켜세우면서 “설 모도와 有德신 가매”라 했다. “처용이 ‘설미’를 모아 가지고 있어서 가슴이 유덕하다”는 뜻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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