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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장석남 - 활짝 핀 꽃그늘 속을 걸어서


저, 꽃밭에 스미는 바람으로
서걱이는 그늘로
편지글을 적었으면, 함부로 멀리 가는
사랑을 했으면, 그 바람으로
나는 레이스 달린 꿈도 꿀 수 있었으며,
꽃 속에 머무는 햇빛들로
가슴을 빚었으면 사랑의
밭은 처마를 이었으면
꽃의 향기랑은 몸을 섞으면서 그래 아직은
몸보단 영혼이 승한 나비였으면
내가 내 숨을 가만히 느껴 들으며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몸에, 도망은 별 몇을
꼭 나처럼 가여워해 이내
숨겨주는 일 같네.

 - 시 "꽃밭을 바라보는 일"전문


  그 애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역시 먼 기억이긴 해도 숨을 고르고 생각해볼 수밖에 없겠다. 그것이 첫사랑의 회상일 경우 어찌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있으랴. 듣던 음악도 이미 묵은 무엇 같아 다른 것으로 바꾸고 나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여울물 속을 들여다보듯 그 기억들을 들여다본다. 오 행복의 못자리들. 혹은 송어떼들. 헌데 어떤 여자를 첫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의 널따란 치맛자락을 첫사랑이라고 해야할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이웃학교 한 여학생을 그것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다. 매일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치던 그 잘록한 허리를 가졌던 한 학년 아래 여학생도 있었다.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한 그 여학생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대학 1학년때 불현듯 만난 그 애가? 아니 그 애들이? 모두 다 가슴을 흔들었고 마음에 웅덩이를 하나씩 만들어 놓은 여인들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후 모든,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그것이 얼마나 되랴만)은 첫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오, 축복 있을진저, 첫사랑들에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되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는, 그러니까 그 사랑의 모든 시간들은 다 꽃그늘 속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떤 뛰어난 기억력도 사랑의 기억만큼은 온전히 복원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다시 회상해낼 수 없는 것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것이고, 다시 오지 않는 것이다. 그저 단 한 번 지나간 일일 뿐이다. 단지 가슴을 떨었다든지 하는 정도의 기억일 뿐이다. 그 가슴마저도 지금은 다른 것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활짝 핀 꽃그늘 속이란 늘 그 속에 있을 때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이성을 잃는 것이며 그 밖으로 나오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그런 곳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시내 분식집에서 음악을 틀어 주는 형이 있었다. 그 형은 군대를 막 제대한 국문과 휴학생이었다. 그곳에는 시를 습작하는 방송대 국문과에 다니는 누나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문학소년이었다. 내가 그런 소년이라는 것을 그 음악을 틀어주는 형이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곳엘 들렀는데 그 형이 두툼한 대학 노트를 하나 주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아주 정갈하게 정리한 시와 그 시에 맞게 그려넣은 그림들이 한 권 가득했다. 근처 여학교의 같은 학년 여학생의 것이었다. 그 아이도 문학소녀였고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아이였다.

  어느 날 그 애를 그 분식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얼굴이 아주 동그랗게 생긴 자그마한 애였다. 첫인상이 비유하자면 첫물로 따온 오이를 뚝 부러뜨렸을 때 퍼지는 그런 향기가 막 풍겨올듯한 아이였다. 하긴 그때 어느 여학생을 만났던들 그렇지 않았으랴만. 그 아이를 만나고 집엘 왔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그 애의 머리 모양이 좀 특이했었는데 그런 비슷한 뒷모습을 길을 가다가 보게 되면 혹시나 하여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 애의 집은 개봉역에서 내렸었다. 다 늦은 저녁 때 동인천역에서 내가 내려야 하는 역을 한참을 더 지나는 개봉역까지 전철을 같이 타고 갔던 기억이 난다. 같이 나눈 이야기 중에는, 요즈음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할머니 무덤엘 가보면 할머니가 추워할 것 같다는 참 유치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문학소녀답게 당돌한 구석도 있었는데 이담에 크면 서울 명동 같은 데서 작은 술집을 하는 것이 꿈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때 나는 그 애의 그런 장래 희망이 꼭 실현될 것만 같아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리라 생각했었다. 헌데 정말 그렇게 되었는지. 혹시 그런 좋은 꿈을 접고서 어디서 지지고 볶는지.

  어느 토요일 오후 동인천역 광장 시계탑 앞.(그러한 곳에서 지금 아이들도 서로들 만나는지) 그곳이 약속 장소였다. 나는 그 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고 있는데 그 해는 오지 않고 같은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와서 하는 말이 그 애는 일이 있어서 갔다는 것이다. 화가 나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대합실 쪽으로 그 아이가 들어가는 것을 내가 보아버리고 만 것이다. '니가 잘난 척을 하고 있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나중에 무슨 시화전에 같이 참여했으므로 자연스레 대면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속마음을 숨기고 잘난 척을 했기 때문에 그 이후 만남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자 아이들은 처음엔 다 잘난 척을 한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알고 나서는 내가 잘난 척한 것을 후회했다. 모두가 지나간 후였다. 흐지부지 끝난 내 첫 번째 첫사랑이다.  그 애가 잘난 척을 하기 전까지 나는 숨이 막힐 듯한 꽃그늘 속에 있었던 셈이다. 그해 말인가 그 다음해 말인가 다시 이성복의 첫 시집 속 시구처럼 또 첫사랑이 불어닥친다. 그 애도 내 가슴을 뛰게 했던 아이였는데 두어 번인가 만나고는 잘 만나주지 않아 안 만났다. 그애는 얼핏 보면 아주 예쁜 얼굴이었는데 뜯어보면 못된 성질이 묻어 있는 인상이었다. 헤어진 지 오랜 어느 날, 어느 당구장엘 들어갔는데 그 애가 어떤 머슴애들이랑 히히덕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모습은 즐겁지 않았다. 바람둥이였었나?

다시 첫사랑이 불어왔다.
몇 번 만났고 몇 편의 편지가 오고갔다.
그러나 이념이 달랐다.
시들했다.

다시 첫사랑이 불어왔다.
그 애는 너무 계산적이어서 싫었다.
그러나 손을 잡아 보기도 했다.

다시 첫사랑이 불었다.
이 애는 내 성격이 너무 소극적인 자기와 비슷하다고 갔다.

다시 첫사랑이 불어오고 불려갔다.
나도 모르게 어느 날 내게서 첫사랑이 불어간 적도 있으리라.
그런 소문도 들었다.

  어느 해 여름 나는 내 지나온 생활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어 혼자 서해의 어느 섬으로  갔었다. 밥을 끊여먹으면서 여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울긋불긋한 피서객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물론 죽음 같은 것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까지의 내 청춘이란 것이 참으로 한 번쯤 정리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누추해져 있었던 것이다. 혼자서 맘껏 한적한 해변을 걷고 또 걸으면 마음에 새로운 살이 돋아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우선은 사람들을 좀 피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피서철이 끝나고 간이상점들이 폐쇄되었다. 그 중 어느 상점에 가위표로 각목을 대고 못을 치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리고는 섬은 황량해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나니 모래 위는 사람의 발자국 대신 바람의 결들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 모래 위를 천천히 걸으면서 피폐해진 내 청춘의 이러저러한 문제의 목록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역시 사랑의 문제에도 어지간히 시달렸던 것 같다. 아니 당시 하고 싶었던 일들이 너무나 많았던 내게 사랑의 문제는 어쩌면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일지도 몰랐다. 사랑이라는 이 관념을 어떻게 환원해 내 마음과 육체 속에 제자리를 찾아줄 것인가. 어떻게 번역해내야 하는가. 내 청춘은 지금 어떤 욕망과 싸우고 있는가. 욕망의 실체는 과연 어떤  것인가.

  어느 날 밀물이 들어와 내 발치에서 수런수런대고 있었다. 조용히 어둠이 오고 별이 빛났다. 물결 곁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졌다. 밀물이 마음에까지 밀려들어와 수런거리고 있었다. 그 위에도 별이 내려와 빛났다. 이 밀물이 그렇듯이, 사랑은 내 안에서 싹트지만 내 의지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 하는 것이다. 순리가 하는 것이다. 그분이 하자는 대로 길을 넓게 잘 닦아주면 될 일이다. 사랑 때문에 아프다면 그것은 내가 아픈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온 신이 아픈 것이다. 사랑의 설렘 또한 그런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불현 듯 누에의 실처럼 연이어 머리에 떠올랐다. 맞는 것 같았다. 사랑은 육체 이전의 문제이고, 정신 이전의 문제이듯, 도덕 이전의 문제이고, 슬픔 이전의 문제이고, 법과 제도와 계산 이전의 문제이고, 심지어 사랑은 사랑 이전의 문제였다. 사랑은 다만 심장의 고동과 타협하며 육체와 정신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불어닥치는 것이다. 출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부터 불어닥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불어닥친 것은 지나가는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과식을 했을 것이다. 지금 시간이 다 지나고 나니 첫사랑의 앙상한 잔영들이 몇 개 남아 있다. 가슴이 뛰고 늘 먼 곳을 보게 했던 그때의  지상에서 몇 센티미터쯤 떠 지내던 시절의 그림자들.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 애들은 지금 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까. 부디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았기를. 저 앞에 놓인 첫사랑의 꽃그늘 속을 다시 가보고 싶다. 그러나 천천히 갈 것인가 뛰어갈 것인가.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첫물 오이를 뚝 부러뜨렸을 때 퍼지는 그 향들을 기리며.


  장석남 -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등이 있고,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
    이은정 2010.11.01 08:55
    <P>잘 읽었습니다.^^</P>
    <P>가을 햇살이 눈부신 아침입니다.</P>
    <P>오늘도 행복한 하루 열어가세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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