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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꽃이 넝쿨째!」(시인 손정순)   2009년 7월 30일





 





비온 뒤 불쑥 자란 호박 넝쿨을 보면 여기저기 웃음꽃이 터진다. 밤새 엄마가 된 암꽃들은 어린 생명을 줄줄이 등에 업었다. 갓난아이를 들쳐 업고서도 당당하게 미소 짓는 저 호박꽃! 고향의 어머니 같다. 어머니의 어머니 같다. 도대체 누가 “호박꽃도 꽃이냐”고 핀잔했을까? 꽃, 씨, 열매, 줄기, 잎까지 하나도 버릴 게 없는 매력 만점 호박의 속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하지 못한 이들의 아둔함이다. 호박꽃은 나에게 아름다움을 넘어선 특별한 존재다. 하얀 이빨이 튕겨 나올 것만 같은 아버지의 환한 웃음, 그 웃음꽃이  넝쿨 속에 송두리째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고향에는 담장이 따로 없었다. 호박 넝쿨이 자연스레 울타리를 이루며 담장 몫을 했다.


이른 아침, 집이 무너질 듯 호탕한 웃음 소리에 눈을 뜨면 담장과 지붕에  넝쿨째 매달린 호박덩이가 쿵, 하고 떨어져 있었다. 그런 날이면 윗집 아랫집 담 너머로 호박전과 수제비 그릇이 오가며 한바탕 웃음꽃을 피웠다.


도시로 나와서도 고향의 정서를 버리지 못한 부모님은 봄이면 늘 화단에 호박씨를 심으셨다. 생명력이 강한 호박은  넝쿨을 이루며 도회의 지붕 위에서도 초롱불을 밝히는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냈다. 호박 넝쿨에 줄줄이 매달린 호박꽃처럼 절로 입가에 웃음보가 터진 아버지는 여름에는 싱싱한 애호박을, 가을에는 잘 여문 황금빛 호박을 들고 담장 높은 이웃집 문을 두드렸다. 과묵했으며, 훤칠하게 키가 크셨던 아버지, 그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많으셨던 아버지, ‘울면서 한세상’이라던 아버지께서 잇몸마저 드러내며 환하게 웃으실 땐, 어린 마음에도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가슴 뭉클해졌다. 서울 생활이 힘들 때도 아버지의 이 웃음은 나를 견디게 해준 힘이었다.


 


IMF 이후 인문학과 사회과학 시장은 거의 폐업 상태로 문을 닫거나, 주종을 바꾸는 출판사들이 많았다. 출판사들이 단합하여 파주출판단지로 이전할 때도,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문학출판 10년 세월에 몸과 마음은 지쳐 있었고, 그 심신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어 준 것은 우리 동네에서 바라 보이는 안산이었다. 나는 북아현동에서 안산이 가장 잘 바라 보이는 주택가로 출판사를 옮겼다. 이곳은 30년 이상 된 낡은 주택이라,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지만, 엄청난 비용 때문에 리모델링도 그만두었다.


봄이 되자 아랫집은 온통 개나리꽃이 담장 높이 울타리를 만들어 눈이 부셨다. 개나리가 질 무렵이면 안산에는 펑, 펑, 쉴 새 없이 산벚꽃이 터졌고, 산벚꽃이 지면 윗집에서는 탐스런 장미  넝쿨이 우리 담장 너머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장미의 숨겨진 가시처럼, 철조망으로 굳게 닫힌 이웃의 대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서로 얼굴도 모른 채 2년 동안 저택 사이에 끼어 묵은 책장만 넘기던 어느 날, 나는 호박꽃이 지천인 고향 담장에서 아버지와 함께 활짝 웃고 있는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아하, 이거야!” 나는 어머니가 식용으로 보내주신 조선호박의 속을 타서 그 씨를 군데군데 나눠 심었다. 6월이 되자 마른 땅에서 호박 새순이 나고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출판사의 작은 텃밭은 호박꽃 둔덕이 되었다. 향나무 위로 올라간  넝쿨은 다시 담쟁이  넝쿨을 타고 사무실 창문을 침범하더니, 담장 위 아래로 급속도로 번졌다. 그러자 이웃 회장님께서 지나가다 드디어 자동차 문을 열었다. “이사 오셨죠? 인사가 늦었네요. 근데 이 동네 토양은 호박 넝쿨만 무성하지 열매는 절대 안 열린답니다.”


웬 아닌 밤중에 홍두깨! 안타까운 듯 일러 주는 토박이 이웃의 씁쓸한 경험담이 벌에게 한 방 쏘인 것처럼 얼얼했지만 나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처럼 수박껍질 등 거름 될 만한 것들을 땅 속에 파묻으며 열매가 맺히길 기도했다. 기도 덕분일까? 며칠 짧은 장마가 지나자마자 하나 둘도 아니고, 꽃마다 애호박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급기야 담장 밖 길가에도 호박꽃이 열매를 맺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아, 탄성을 질렀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담장에 탐스런 호박을 주렁주렁 매단 꽃 넝쿨이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련한 고향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돈 한 푼 안 든 웰빙 리모델링이다. 나는 대문을 활짝 열고 방을 붙였다. “무공해 호박을 드립니다. 누구든지 필요하신 분은 가져가세요.” 그러자 서먹하던 이웃은 물론이고, 출판사 필자들, 이웃 동네 사람들까지 찾아와 호박과 호박꽃, 호박잎들을 따갔다. 어떤 분은 호박으로 칼국수를 끓였다며 가져다 주시기도 하고, 정성스레 빚은 호박꽃 만두를 보내 주셨다. 호박으로 움츠렸던 출판사는 다시 기지개를 켰다. 이웃과 닫혔던 문도 활짝 열고 늘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다. 윗집 회장님은 “참 이상하네! 우리 집에는 호박이 안 열리는데….”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셨다(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올해도 출판사에는  넝쿨째 환한 웃음을 매단 아버지의 호박꽃이 한창이다. 그런데 웬일이지? 옆집 옥상에도, 윗집 정원에도 호박 넝쿨이 살짝 웃음꽃을 피웠다. 올해는 이웃에게도 웃음과 행운 가득한 호박들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길!






















■ 필자 소개


 




손정순(시인)


1970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하여 대구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2001년 《문학사상》에 「개심사 거울못」 외 2편으로 등단. 문화계간지 《쿨투라》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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