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902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1997년도라는 해」(시인 김영남)   2009년 7월 28일





 





1997년도. 행운의 숫자가 맨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데도 나에게 그해 일어난 일들은 정반대였다. 반년 전부터 시작한 나라의 경제위기는 결국 IMF라는 관리체제를 불러 왔고 이는 우리 집까지 몰아쳤다. 맞벌이 직장생활 10년 만에 겨우 마련한 25평 아파트가 어느 날 갑자기 경매에 넘어갔고, 가압류 통지서가 직장으로까지 날아들었다. 보따리 싸들고 모두 길거리로 나서야 할 형편이 된 것이다. 보증을 함부로 서 준 결과였다.


 


가장으로서 체면이 여지없이 구겨졌고, 마라톤 선수 출신으로서 당당하고 씩씩한 모습도  온데간데 없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매사에 풀 죽은 모습이었고, 마치 데친 나물처럼 기죽어 집에 들어오곤 했다. 저녁을 물린 다음 말끝마다 아내에게 핀잔까지 들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면 그때 그 심정을 미루어 짐작하리라.


 


있을 법한 실수를 딱 한 번 저질렀을 뿐인데 이로 인하여 모든 것이 영 풀 죽어 버린 것이다. 그 풀 죽은 몸 때문에 또 밤마다 아내에게 당한 고충을 이제 와 다시 들먹거린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얼마나 시달렸는지 당시 노트에 메모해 둔 <나의 위크포인트(약점)>라는 시를 읽어보자.


 


*


 


고것이 형편없다며, 아니 너무 작다며 내 고충을 제일 잘 알고 있는 마누라가 밤마다 괴롭혀 오면 난 정말 죽을 지경이 됩니다.


형편없는 게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만 마누라가 베개맡에서 나의 제일 민감한 포인트를 아예 노골적으로 불평해 오면 나는 결혼한 것이 정말 후회스럽습니다. 더욱이 이를 개선할 돈도 없으니… 밤이 되는 것이 무서워집니다.


그러나 고렇게밖에 물려받지 못한 걸 어떡합니까? 그렇다고 옆집 아저씨에 견주고, 대학 동창들한테까지 비교하면 내 얼굴이 뭐가 됩니까? 난 또 어떻게 고개를 들고 거리를 다닙니까?


말이 났으니 터놓고 한번 얘기해 봅시다. 그것이 큰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으리으리한 기둥과 튼튼한 지붕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부드러운 손, 따뜻한 가슴이 없으면 그건 말짱 헛것이에요. 그건 따뜻한 아랫목과 향기로운 이야기가 존재해야 진정한 의미의 그것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당신, 너무 큰 것만 좋아하지 마세요. 침실이란 작은 것이 더 따뜻하고 아늑해요.


안 그래요, 침실이란?


 


*  


 


내가 이 시를 포함한 4편의 시를 묶어 세계일보사에 투고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도 1997년도이었다.






















■ 필자 소개


 




김영남(시인)


1957년 전남 장흥 출생. 1997년「세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정동진역」 「모슬포 사랑」 「푸른 밤의 여로」등이 있음.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9620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8917
477 「광진이 형」(시인 김두안) 바람의종 2009.07.06 7876
476 내려갈 때 보았네 風文 2015.01.13 7880
475 「사랑은 아무나 하나」(시인 이상섭) 바람의종 2009.08.11 7883
474 얼굴 풍경 바람의종 2012.08.20 7892
473 좋은 사람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7901
472 구경꾼 風文 2014.12.04 7901
» 「1997년도라는 해」(시인 김영남) 바람의종 2009.07.29 7902
470 '더러움'을 씻어내자 바람의종 2012.11.28 7904
469 「진한 눈물의 감동 속에도 웃음이 있다 」(시인 신달자) 바람의종 2009.05.20 7905
468 예술이야! 風文 2014.12.25 7906
467 등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6.02 7915
466 '욱'하는 성질 바람의종 2012.09.11 7921
465 「스페인 유모어」(시인 민용태) 바람의종 2009.06.09 7940
464 열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도 있다 바람의종 2012.09.04 7940
463 '산길의 마법' 윤안젤로 2013.04.11 7945
462 유쾌한 활동 風文 2014.12.20 7946
461 12월의 엽서 바람의종 2012.12.03 7950
460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 風文 2015.08.09 7953
459 엄마의 주름 風文 2014.08.11 7954
458 '높은 곳'의 땅 바람의종 2012.10.04 7966
457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바람의종 2008.10.23 7977
456 연암 박지원의 황금에 대한 생각 바람의종 2007.02.01 7983
455 뒷목에서 빛이 난다 바람의종 2012.11.05 7988
454 참기름 장사와 명궁 바람의종 2008.01.28 7997
453 혼자서는 이룰 수 없다 바람의종 2008.10.10 799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96 97 98 99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