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912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1997년도라는 해」(시인 김영남)   2009년 7월 28일





 





1997년도. 행운의 숫자가 맨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데도 나에게 그해 일어난 일들은 정반대였다. 반년 전부터 시작한 나라의 경제위기는 결국 IMF라는 관리체제를 불러 왔고 이는 우리 집까지 몰아쳤다. 맞벌이 직장생활 10년 만에 겨우 마련한 25평 아파트가 어느 날 갑자기 경매에 넘어갔고, 가압류 통지서가 직장으로까지 날아들었다. 보따리 싸들고 모두 길거리로 나서야 할 형편이 된 것이다. 보증을 함부로 서 준 결과였다.


 


가장으로서 체면이 여지없이 구겨졌고, 마라톤 선수 출신으로서 당당하고 씩씩한 모습도  온데간데 없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매사에 풀 죽은 모습이었고, 마치 데친 나물처럼 기죽어 집에 들어오곤 했다. 저녁을 물린 다음 말끝마다 아내에게 핀잔까지 들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면 그때 그 심정을 미루어 짐작하리라.


 


있을 법한 실수를 딱 한 번 저질렀을 뿐인데 이로 인하여 모든 것이 영 풀 죽어 버린 것이다. 그 풀 죽은 몸 때문에 또 밤마다 아내에게 당한 고충을 이제 와 다시 들먹거린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얼마나 시달렸는지 당시 노트에 메모해 둔 <나의 위크포인트(약점)>라는 시를 읽어보자.


 


*


 


고것이 형편없다며, 아니 너무 작다며 내 고충을 제일 잘 알고 있는 마누라가 밤마다 괴롭혀 오면 난 정말 죽을 지경이 됩니다.


형편없는 게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만 마누라가 베개맡에서 나의 제일 민감한 포인트를 아예 노골적으로 불평해 오면 나는 결혼한 것이 정말 후회스럽습니다. 더욱이 이를 개선할 돈도 없으니… 밤이 되는 것이 무서워집니다.


그러나 고렇게밖에 물려받지 못한 걸 어떡합니까? 그렇다고 옆집 아저씨에 견주고, 대학 동창들한테까지 비교하면 내 얼굴이 뭐가 됩니까? 난 또 어떻게 고개를 들고 거리를 다닙니까?


말이 났으니 터놓고 한번 얘기해 봅시다. 그것이 큰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으리으리한 기둥과 튼튼한 지붕 같은 것으로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부드러운 손, 따뜻한 가슴이 없으면 그건 말짱 헛것이에요. 그건 따뜻한 아랫목과 향기로운 이야기가 존재해야 진정한 의미의 그것이 될 수 있는 겁니다.


 


당신, 너무 큰 것만 좋아하지 마세요. 침실이란 작은 것이 더 따뜻하고 아늑해요.


안 그래요, 침실이란?


 


*  


 


내가 이 시를 포함한 4편의 시를 묶어 세계일보사에 투고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도 1997년도이었다.






















■ 필자 소개


 




김영남(시인)


1957년 전남 장흥 출생. 1997년「세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정동진역」 「모슬포 사랑」 「푸른 밤의 여로」등이 있음.


  1.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Date2023.02.04 By風文 Views9880
    read more
  2. 친구야 너는 아니

    Date2015.08.20 By風文 Views99163
    read more
  3. 정답이 없다

    Date2014.12.05 By風文 Views8007
    Read More
  4. 소인배 - 도종환

    Date2008.07.24 By바람의종 Views8006
    Read More
  5. 친구라는 아름다운 이름

    Date2008.09.29 By바람의종 Views8004
    Read More
  6. 지금 시작하고, 지금 사랑하자!

    Date2007.09.03 By바람의 소리 Views8003
    Read More
  7. 참기름 장사와 명궁

    Date2008.01.28 By바람의종 Views8002
    Read More
  8. 혼자서는 이룰 수 없다

    Date2008.10.10 By바람의종 Views8001
    Read More
  9. 뒷목에서 빛이 난다

    Date2012.11.05 By바람의종 Views7994
    Read More
  10. '높은 곳'의 땅

    Date2012.10.04 By바람의종 Views7970
    Read More
  11. 엄마의 주름

    Date2014.08.11 By風文 Views7958
    Read More
  12.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

    Date2015.08.09 By風文 Views7954
    Read More
  13. 12월의 엽서

    Date2012.12.03 By바람의종 Views7952
    Read More
  14. 「스페인 유모어」(시인 민용태)

    Date2009.06.09 By바람의종 Views7951
    Read More
  15. '산길의 마법'

    Date2013.04.11 By윤안젤로 Views7950
    Read More
  16. 유쾌한 활동

    Date2014.12.20 By風文 Views7948
    Read More
  17. 열번 찍어 안 넘어 가는 나무도 있다

    Date2012.09.04 By바람의종 Views7940
    Read More
  18. '욱'하는 성질

    Date2012.09.11 By바람의종 Views7923
    Read More
  19. 예술이야!

    Date2014.12.25 By風文 Views7919
    Read More
  20. 등 / 도종환

    Date2008.06.02 By바람의종 Views7915
    Read More
  21. 「1997년도라는 해」(시인 김영남)

    Date2009.07.29 By바람의종 Views7912
    Read More
  22. 좋은 사람 - 도종환

    Date2008.07.21 By바람의종 Views7911
    Read More
  23. 「진한 눈물의 감동 속에도 웃음이 있다 」(시인 신달자)

    Date2009.05.20 By바람의종 Views7906
    Read More
  24. '더러움'을 씻어내자

    Date2012.11.28 By바람의종 Views7904
    Read More
  25. 구경꾼

    Date2014.12.04 By風文 Views7903
    Read More
  26. 얼굴 풍경

    Date2012.08.20 By바람의종 Views7896
    Read More
  27. 「사랑은 아무나 하나」(시인 이상섭)

    Date2009.08.11 By바람의종 Views7886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