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8062 추천 수 12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광진이 형」(시인 김두안)   2009년 7월 2일_마흔일곱번째





 





대나무 울타리가 보입니다. 댓돌 위에 지팡이 하나, 신발 한 켤레 놓여 있습니다. 작고 고요한 집은 커다란 귓바퀴 같아서 팔꿈치를 벌떡 세우고 금방 일어설 것 같습니다. 그가 서울 맹인학교에서 안마와 점자를 배워 돌아오고 마당에는 애달픈 라디오 소리만 쌓여 갑니다. 그는 오늘도 막배 올 시간에 어김없이 부두로 나갑니다. 가파른 골목을 가만가만 두드리는 소리 들립니다. 귀밝은 지팡이가 먼저 골목을 꺾어 돌아가고 싱글벙글 그림자 뒤따라갑니다. 허연 눈동자를 몇 번 해에 비춰보고 분명 뭔가 보았다는 듯 서둘러 지팡이를 재촉합니다. 대숲이 흔들리고 골목 똥개들 컹컹 짖습니다. 소문난 기와집 목련나무 가지 담장 너머로 찬밥 한 공기 건네줍니다. 마을 어귀 그물 꿰매는 아낙네들 술잔에 흥겨워 그를 불러 세웁니다.


 


어이 총각! 거시기에 털났으까 잉-


혹시 또 알아,


올봄에 눈먼 처녀라도 하나 섬에 떠밀려올지


아따 이 사람들아-


둘 다 눈멀먼 안 돼제,


홀딱 벗고 자다 날샌지도 모르먼 쓰것는가


화끈거리는 농담 소리


시궁창 민들레꽃을 훌쩍 뛰어 넘어갑니다.


 


부두를 배회하는 갈매기 소리 들립니다. 그가 슈퍼 간판 밑에 걸터앉아 싱글벙글 웃습니다. 발뒤꿈치를 구르며 눈먼 눈으로 바다를 쳐다봅니다. 하얀 천신호가 죽섬을 희미하게 돌아옵니다. 두근거리는 뱃소리 점점 가깝게 들립니다. 썰물 거슬러와 가슴을 쿵 부딪칩니다. 한바탕 부두가 술렁거립니다. 젖은 발소리들 철썩철썩 마을을 향해 사라집니다. 그는 발소리가 지나칠 때마다 텅 빈 소라 껍데기처럼 귀를 기울입니다. 이 발소리도 아니라고, 세차게 얼굴을 털어냅니다. 노을을 첨벙첨벙 건너가는 발소리. 그의 얼굴에 쓸쓸한 파문이 번집니다. 누굴 기다리느냐고 물으면 턱을 절레절레 흔듭니다. 그런 게 아니라고, 가슴께에 웃음을 파묻습니다. 부두를 가만히 밀어내며 막배가 떠나갑니다. 뱃고동 소리 섬 깊숙이 파고듭니다. 거품길이 지워지고 이제 부두에는 긴 그림자 하나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까마득히 멀어지는 발소리 컴컴하게 더듬고 있습니다. 지팡이로 힘껏 부두를 몇 번 두들겨 볼 뿐 그는 서울에서 만났던 그 지팡이 소리 기다린 적 없습니다.

















■ 필자 소개


 




김두안(시인)


1965년 전남 신안군 임자도 출생. 임자중, 목포 영흥고 졸업. 2006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7433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6973
2589 진실한 관계 風文 2019.06.06 1193
2588 진실이면 이긴다 風文 2023.03.25 975
2587 진실이 가려진 최악의 경우 風文 2022.02.08 998
2586 진실된 접촉 바람의종 2010.04.10 3885
2585 진면목을 요청하라 - 헬리스 브릿지 風文 2022.11.09 1040
2584 진득한 기다림 바람의종 2008.02.03 7338
2583 직관과 경험 風文 2014.11.12 10123
2582 직관 바람의종 2009.05.08 6902
2581 직감 바람의종 2011.03.11 5494
2580 지혜의 눈 風文 2022.12.31 965
2579 지혜를 얻는 3가지 방법 風文 2019.08.26 890
2578 지하철에서 노인을 만나면 무조건 양보하라 바람의종 2008.05.22 7766
2577 지켜지지 않은 약속 바람의종 2011.12.03 6605
2576 지적(知的) 여유 바람의종 2009.07.15 6040
2575 지식 나눔 바람의종 2011.12.22 6728
2574 지배자 바람의종 2009.10.06 5340
2573 지란 지교를 꿈꾸며 中 - 유안진 바람의종 2008.01.16 8448
2572 지도자를 움직인 편지 한통 風文 2022.10.25 1370
2571 지난 3년이 마치 꿈을 꾼 듯 바람의종 2009.06.09 5733
2570 지나고 보면 아름다웠다 싶은 것 두 가지 風文 2015.06.24 8059
2569 지나고 보면 아름다웠다 싶은 것 두 가지 風文 2023.11.10 1009
2568 지금이 중요하다 風文 2020.05.08 1130
2567 지금의 너 바람의종 2009.06.11 7474
2566 지금의 나이가 좋다 風文 2024.02.17 865
2565 지금은 조금 아파도 바람의종 2010.05.29 444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