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809 추천 수 2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목련꽃 꽃잎 가장자리가 흙빛으로 타들어가는 게 보입니다. 벌써 꽃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아침에는 새들이 날아와 꽃술과 흰 꽃잎을 부리로 톡톡 쪼아 먹는 게 보였는데 오늘 저녁에는 꽃이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꽃을 보는 나만 '어느새'라고 말하는 것이지 꽃은 희고 고운 꽃봉오리를 피워놓고 그 사이에 많은 걸 겪었습니다.

봄비가 퍼부은 날도 있었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황사 몰려온 날도 있었으며, 며칠씩 흐린 날이 이어지기도 했고, 엊그제는 산 너머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꽃샘추위를 견디느라 힘든 밤에도 나는 그저 꽃이 늘 피어 아름답게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비와 바람 황사와 추위 속에서 언제나 환하게 피어 있는 꽃은 없습니다. 그 속에서도 꽃을 지키고 그 꽃을 푸른 잎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혼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보아주는 이가 있건 없건 꽃은 저 혼자 곱게 피었다 소리 없이 돌아갑니다.

뒤뜰에 백목련 피었다 지는 시간에 창가에 모과나무 꽃순이 파란 손을 펼치며 앙증맞게 자라 오르고 있습니다. 모과꽃도 눈에 뜨일 듯 말듯 그러게 피어날 겁니다. 향기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있다가 갈 겁니다. 저도 그렇게 있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모과꽃처럼 살다 갔으면
꽃은 피는데
눈에 뜨일 듯 말 듯

벌은 가끔 오는 데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모과꽃처럼 피다 갔으면

빛깔로 드러내고자
애쓰는 꽃 아니라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나무 사이에 섞여서
바람하고나 살아서
있는 듯 없는 듯

---「모과꽃」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이 다 그렇듯 저도 "눈에 뜨일 듯 말 듯"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드러내고자 / 애쓰는 꽃 아니라 /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있다가 가고 싶습니다.

숲의 모든 나무가 그렇듯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저 봄이면 이렇게 조촐한 꽃 하나 피워놓고 있다가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소월이 「산유화」에서 이야기한 '저만치' 거리를 두고 서 있고 싶습니다.

지난 일 년 간 이삼일에 한 통씩 여러분들께 엽서를 보냈습니다. 엽서를 여기까지 쓰고 저도 잠시 쉬겠습니다. 지는 꽃잎과 함께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그렇게 있을까 합니다. 그동안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늘 청안하시길 바랍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2789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2200
3034 153세 냉동인간이 부활했다? - 냉동인간에 대하여 바람의종 2007.09.19 46820
3033 ‘옵아트’ 앞에서 인간은 천진난만한 아이가 된다! 바람의종 2007.08.15 46253
3032 '푸른 기적' 風文 2014.08.29 39067
3031 사랑이 잔혹한 이유는 에로스 신 부모 탓? 바람의종 2008.03.27 26445
3030 쥐인간의 죄책감은 유아기적 무의식부터? - 강박증에 대하여 바람의종 2007.10.10 25276
3029 행복과 불행은 쌍둥이 형제라고? 바람의종 2007.08.09 22413
3028 세한도(歲寒圖) - 도종환 (125) 바람의종 2009.02.02 21504
3027 희망이란 風文 2013.08.20 19341
3026 현대예술의 엔트로피 바람의종 2008.04.09 18775
3025 '야하고 뻔뻔하게' 風文 2013.08.20 18749
3024 정말 당신의 짐이 크고 무겁습니까? 바람의종 2007.10.10 18681
3023 136명에서 142명쯤 - 김중혁 윤영환 2006.09.02 18394
3022 Love is... 風磬 2006.02.05 18087
3021 그가 부러웠다 風文 2013.08.28 18085
3020 다다이즘과 러시아 구성주의에 대하여 바람의종 2010.08.30 17804
3019 커피 한 잔의 행복 風文 2013.08.20 17542
3018 히틀러는 라디오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었다 바람의종 2008.08.05 16889
3017 자연을 통해... 風文 2013.08.20 16633
3016 흉터 風文 2013.08.28 16385
3015 젊은이들에게 - 괴테 바람의종 2008.02.01 16385
3014 방 안에 서있는 물고기 한 마리- 마그리트 ‘낯설게 하기’ 바람의종 2007.02.08 15413
3013 신문배달 10계명 風文 2013.08.19 15356
3012 길 떠날 준비 風文 2013.08.20 15355
3011 세계 최초의 아나키스트 정당을 세운 한국의 아나키스트 바람의종 2008.07.24 1531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