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3.29 13:29
모과꽃 - 도종환 (148 - 끝.)
조회 수 6725 추천 수 20 댓글 0
봄비가 퍼부은 날도 있었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황사 몰려온 날도 있었으며, 며칠씩 흐린 날이 이어지기도 했고, 엊그제는 산 너머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꽃샘추위를 견디느라 힘든 밤에도 나는 그저 꽃이 늘 피어 아름답게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비와 바람 황사와 추위 속에서 언제나 환하게 피어 있는 꽃은 없습니다. 그 속에서도 꽃을 지키고 그 꽃을 푸른 잎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혼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보아주는 이가 있건 없건 꽃은 저 혼자 곱게 피었다 소리 없이 돌아갑니다.
뒤뜰에 백목련 피었다 지는 시간에 창가에 모과나무 꽃순이 파란 손을 펼치며 앙증맞게 자라 오르고 있습니다. 모과꽃도 눈에 뜨일 듯 말듯 그러게 피어날 겁니다. 향기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있다가 갈 겁니다. 저도 그렇게 있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모과꽃처럼 살다 갔으면
꽃은 피는데
눈에 뜨일 듯 말 듯
벌은 가끔 오는 데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모과꽃처럼 피다 갔으면
빛깔로 드러내고자
애쓰는 꽃 아니라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나무 사이에 섞여서
바람하고나 살아서
있는 듯 없는 듯
---「모과꽃」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이 다 그렇듯 저도 "눈에 뜨일 듯 말 듯"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드러내고자 / 애쓰는 꽃 아니라 /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있다가 가고 싶습니다.
숲의 모든 나무가 그렇듯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저 봄이면 이렇게 조촐한 꽃 하나 피워놓고 있다가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소월이 「산유화」에서 이야기한 '저만치' 거리를 두고 서 있고 싶습니다.
지난 일 년 간 이삼일에 한 통씩 여러분들께 엽서를 보냈습니다. 엽서를 여기까지 쓰고 저도 잠시 쉬겠습니다. 지는 꽃잎과 함께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그렇게 있을까 합니다. 그동안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늘 청안하시길 바랍니다.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 風文 | 2023.02.04 | 9726 |
공지 | 친구야 너는 아니 1 | 風文 | 2015.08.20 | 99061 |
2602 | 황홀한 끌림 | 바람의종 | 2009.03.23 | 7257 |
2601 | 당신이 희망입니다 | 바람의종 | 2009.03.23 | 4509 |
2600 | 점심시간에는 산책을 나가라 | 바람의종 | 2009.03.23 | 6944 |
2599 | 꽃소식 - 도종환 (145) | 바람의종 | 2009.03.23 | 6092 |
2598 | 고맙고 대견한 꽃 - 도종환 (146) | 바람의종 | 2009.03.23 | 6907 |
2597 | 2도 변화 | 바람의종 | 2009.03.24 | 7213 |
2596 | 사람이 항상 고상할 필요는 없다 | 바람의종 | 2009.03.25 | 5478 |
2595 | 들은 꽃을 자라게 할 뿐,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 도종환 (147) | 바람의종 | 2009.03.26 | 5100 |
2594 | 사랑하다 헤어질 때 | 바람의종 | 2009.03.26 | 5447 |
2593 | 자기 비하 | 바람의종 | 2009.03.27 | 6476 |
» | 모과꽃 - 도종환 (148 - 끝.) | 바람의종 | 2009.03.29 | 6725 |
2591 | 내 서른살은 어디로 갔나 | 바람의종 | 2009.03.29 | 6013 |
2590 | 생각의 산파 | 바람의종 | 2009.03.30 | 5758 |
2589 | 몸이 아프면 | 바람의종 | 2009.03.31 | 5611 |
2588 | "'거룩한' 바보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 바람의종 | 2009.03.31 | 10964 |
2587 | 네 안의 거인을 깨워라 | 바람의종 | 2009.04.03 | 6910 |
2586 | 아름다운 욕심 | 바람의종 | 2009.04.03 | 4805 |
2585 | 엄마의 일생 | 바람의종 | 2009.04.03 | 4831 |
2584 |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혼은 있는가?" | 바람의종 | 2009.04.03 | 8505 |
2583 | 불타는 열정 | 바람의종 | 2009.04.09 | 4720 |
2582 | 나를 돕는 친구 | 바람의종 | 2009.04.09 | 6991 |
2581 | 내면의 어른 | 바람의종 | 2009.04.09 | 5865 |
2580 | 계란말이 도시락 반찬 | 바람의종 | 2009.04.09 | 6739 |
2579 | 젊음의 특권 | 바람의종 | 2009.04.13 | 8500 |
2578 | 손을 놓아줘라 | 바람의종 | 2009.04.13 | 5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