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717 추천 수 2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목련꽃 꽃잎 가장자리가 흙빛으로 타들어가는 게 보입니다. 벌써 꽃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아침에는 새들이 날아와 꽃술과 흰 꽃잎을 부리로 톡톡 쪼아 먹는 게 보였는데 오늘 저녁에는 꽃이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꽃을 보는 나만 '어느새'라고 말하는 것이지 꽃은 희고 고운 꽃봉오리를 피워놓고 그 사이에 많은 걸 겪었습니다.

봄비가 퍼부은 날도 있었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황사 몰려온 날도 있었으며, 며칠씩 흐린 날이 이어지기도 했고, 엊그제는 산 너머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꽃샘추위를 견디느라 힘든 밤에도 나는 그저 꽃이 늘 피어 아름답게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비와 바람 황사와 추위 속에서 언제나 환하게 피어 있는 꽃은 없습니다. 그 속에서도 꽃을 지키고 그 꽃을 푸른 잎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혼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보아주는 이가 있건 없건 꽃은 저 혼자 곱게 피었다 소리 없이 돌아갑니다.

뒤뜰에 백목련 피었다 지는 시간에 창가에 모과나무 꽃순이 파란 손을 펼치며 앙증맞게 자라 오르고 있습니다. 모과꽃도 눈에 뜨일 듯 말듯 그러게 피어날 겁니다. 향기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있다가 갈 겁니다. 저도 그렇게 있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모과꽃처럼 살다 갔으면
꽃은 피는데
눈에 뜨일 듯 말 듯

벌은 가끔 오는 데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모과꽃처럼 피다 갔으면

빛깔로 드러내고자
애쓰는 꽃 아니라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나무 사이에 섞여서
바람하고나 살아서
있는 듯 없는 듯

---「모과꽃」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이 다 그렇듯 저도 "눈에 뜨일 듯 말 듯"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드러내고자 / 애쓰는 꽃 아니라 /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있다가 가고 싶습니다.

숲의 모든 나무가 그렇듯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저 봄이면 이렇게 조촐한 꽃 하나 피워놓고 있다가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소월이 「산유화」에서 이야기한 '저만치' 거리를 두고 서 있고 싶습니다.

지난 일 년 간 이삼일에 한 통씩 여러분들께 엽서를 보냈습니다. 엽서를 여기까지 쓰고 저도 잠시 쉬겠습니다. 지는 꽃잎과 함께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그렇게 있을까 합니다. 그동안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늘 청안하시길 바랍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9348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98613
2202 물처럼 사는것이 현명한 삶이다 1 바람의 소리 2007.08.20 6780
2201 초능력의 날개 風文 2014.12.15 6779
2200 달콤한 여유 윤안젤로 2013.03.27 6777
2199 달을 먹다 바람의종 2008.05.22 6772
2198 모든 것은 지나간다 바람의종 2007.10.10 6766
2197 적당한 거리 風文 2014.11.29 6765
2196 風文 2014.12.17 6763
2195 레볼루션 風文 2014.12.13 6760
2194 학생과 교사, 스승과 제자 風文 2015.02.14 6754
2193 자족에 이르는 길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4.16 6753
2192 카지노자본주의 - 도종환 (98) 바람의종 2008.11.26 6752
2191 상사병(上司病) 바람의종 2009.05.21 6751
2190 악덕의 씨를 심는 교육 - 도종환 (133) 바람의종 2009.02.20 6748
2189 계란말이 도시락 반찬 바람의종 2009.04.09 6733
2188 불안 - 도종환 (67) 바람의종 2008.09.09 6732
2187 새로운 곳으로 떠나자 바람의종 2012.12.31 6731
2186 책이 제일이다 바람의종 2009.03.16 6729
2185 「호세, 그라시아스!」(소설가 함정임) 바람의종 2009.06.22 6718
2184 3분만 더 버티세요! 風文 2015.02.17 6718
» 모과꽃 - 도종환 (148 - 끝.) 바람의종 2009.03.29 6717
2182 냉이꽃 한 송이도 제 속에서 거듭 납니다 바람의종 2008.04.11 6712
2181 이웃이 복이다 바람의종 2011.11.10 6701
2180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바람의종 2012.07.02 6695
2179 들꽃 나리 . 2007.06.26 6691
2178 이런 사람과 사랑하세요 바람의종 2009.02.21 668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