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790 추천 수 2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목련꽃 꽃잎 가장자리가 흙빛으로 타들어가는 게 보입니다. 벌써 꽃이 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아침에는 새들이 날아와 꽃술과 흰 꽃잎을 부리로 톡톡 쪼아 먹는 게 보였는데 오늘 저녁에는 꽃이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꽃을 보는 나만 '어느새'라고 말하는 것이지 꽃은 희고 고운 꽃봉오리를 피워놓고 그 사이에 많은 걸 겪었습니다.

봄비가 퍼부은 날도 있었고, 바람이 심하게 불고 황사 몰려온 날도 있었으며, 며칠씩 흐린 날이 이어지기도 했고, 엊그제는 산 너머에 눈이 내렸다는 소식도 들렸습니다. 꽃샘추위를 견디느라 힘든 밤에도 나는 그저 꽃이 늘 피어 아름답게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비와 바람 황사와 추위 속에서 언제나 환하게 피어 있는 꽃은 없습니다. 그 속에서도 꽃을 지키고 그 꽃을 푸른 잎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려고 혼자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겠습니까? 보아주는 이가 있건 없건 꽃은 저 혼자 곱게 피었다 소리 없이 돌아갑니다.

뒤뜰에 백목련 피었다 지는 시간에 창가에 모과나무 꽃순이 파란 손을 펼치며 앙증맞게 자라 오르고 있습니다. 모과꽃도 눈에 뜨일 듯 말듯 그러게 피어날 겁니다. 향기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있다가 갈 겁니다. 저도 그렇게 있고 싶습니다.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모과꽃처럼 살다 갔으면
꽃은 피는데
눈에 뜨일 듯 말 듯

벌은 가끔 오는 데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모과꽃처럼 피다 갔으면

빛깔로 드러내고자
애쓰는 꽃 아니라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나무 사이에 섞여서
바람하고나 살아서
있는 듯 없는 듯

---「모과꽃」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이 다 그렇듯 저도 "눈에 뜨일 듯 말 듯"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드러내고자 / 애쓰는 꽃 아니라 /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있다가 가고 싶습니다.

숲의 모든 나무가 그렇듯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저 봄이면 이렇게 조촐한 꽃 하나 피워놓고 있다가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소월이 「산유화」에서 이야기한 '저만치' 거리를 두고 서 있고 싶습니다.

지난 일 년 간 이삼일에 한 통씩 여러분들께 엽서를 보냈습니다. 엽서를 여기까지 쓰고 저도 잠시 쉬겠습니다. 지는 꽃잎과 함께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그렇게 있을까 합니다. 그동안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늘 청안하시길 바랍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2739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2147
460 몸이 하는 말 바람의종 2009.04.30 6243
459 1분 바람의종 2009.04.25 6425
458 할머니의 사랑 바람의종 2009.04.25 6439
457 한 번쯤은 바람의종 2009.04.25 8305
456 기다리지 말고 뛰어나가라 바람의종 2009.04.25 4847
455 잠들기 전에 바람의종 2009.04.25 7542
454 강해 보일 필요가 없다 바람의종 2009.04.25 5617
453 어루만지기 바람의종 2009.04.14 5964
452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바라보기" 바람의종 2009.04.13 7254
451 못생긴 얼굴 바람의종 2009.04.13 6595
450 손을 놓아줘라 바람의종 2009.04.13 5680
449 젊음의 특권 바람의종 2009.04.13 8575
448 계란말이 도시락 반찬 바람의종 2009.04.09 6815
447 내면의 어른 바람의종 2009.04.09 5907
446 나를 돕는 친구 바람의종 2009.04.09 7051
445 불타는 열정 바람의종 2009.04.09 4767
444 "영원히 변하지 않는 영혼은 있는가?" 바람의종 2009.04.03 8545
443 엄마의 일생 바람의종 2009.04.03 4885
442 아름다운 욕심 바람의종 2009.04.03 4844
441 네 안의 거인을 깨워라 바람의종 2009.04.03 6966
440 "'거룩한' 바보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바람의종 2009.03.31 11082
439 몸이 아프면 바람의종 2009.03.31 5653
438 생각의 산파 바람의종 2009.03.30 5800
437 내 서른살은 어디로 갔나 바람의종 2009.03.29 6049
» 모과꽃 - 도종환 (148 - 끝.) 바람의종 2009.03.29 679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97 98 99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