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754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봄은 소리 없이 옵니다.
겨우내 언 나뭇가지에 내려와 온종일 그 나무의 살갗을 쓰다듬으면서도 봄 햇살은 말이 없습니다. 메마를 대로 메마른 나무 둥치에 내려 나무의 살 속으로 들어가려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자 더 많은 친구들을 불러와 기어코 단단한 각질 아래로 스며들어가면서도 봄비는 조용합니다. 나무의 속을 적시고 새순을 키워 껍질 밖으로 밀어내면서도 봄비는 비명소리 한 번 지르지 않습니다.

웅크린 몸을 좀처럼 펴지 못하고 있는 꽃봉오리를 입김으로 조금씩 열어 내면서도 봄바람은 쇳소리를 내는 법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며 눈을 감고 있는 봉오리마다 찾아가 감싸고 다독이고 쓰다듬으며 꽃이 되게 하는 봄 햇살, 봄비, 봄바람은 늘 소리 없이 움직입니다.

혼자서 꽃을 피우는 꽃나무는 없습니다. 바람이 영혼을 불어넣어 주고 햇살이 몸을 데워 주며 빗방울이 실핏줄을 깨워 주고 흙이 흔들리는 몸을 붙잡아 주어 꽃 한 송이가 피는 것입니다. 꽃 한 송이 속에는 그래서 자연의 온갖 숨결이 다 모여 있고 우주의 수 없는 손길이 다 내려와 있습니다. 그걸 꽃이 제일 먼저 알기 때문에 조용할 줄 아는 것입니다.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고 모든 꽃이 다소곳할 줄 아는 것입니다. 아름답게 피었다가 저를 꽃으로 있게 해 준 자연의 품으로, 우주의 구극(究極) 속으로 말없이 돌아갈 줄 아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피는 꽃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 꽃을 발견할 뿐입니다. 살아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고 하루아침에 꽃을 피우는 꽃나무는 없습니다. 꽃 한 송이를 둘러싼 우주의 모든 생명들이 오랜 세월 그 꽃과 함께 존재하고 일하고 움직이면서 꽃 한 송이를 피우는 것입니다. 억겁의 인연이 그 속에 함께 모여 꽃과 함께 나고 살고 아파하고 기뻐하며 살아 있는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4189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3593
2160 좋아하는 일을 하자 바람의종 2010.03.27 6739
2159 자신있게, 자신답게 風文 2014.12.15 6732
2158 용서 風文 2014.12.02 6725
2157 은행나무 길 - 도종환 (86) 바람의종 2008.10.29 6723
2156 겨울기도 - 도종환 (103) 바람의종 2008.12.06 6722
2155 교환의 비밀: 가난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바람의종 2008.04.22 6717
2154 이웃이 복이다 바람의종 2011.11.10 6712
2153 기다려야 할 때가 있다 바람의종 2012.07.02 6710
2152 「부모님께 큰절 하고」(소설가 정미경) 바람의종 2009.06.10 6704
2151 온화한 힘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7.21 6701
2150 손님이 덥다면 더운거다 風文 2017.01.02 6701
2149 평화의 장소 바람의종 2012.12.27 6699
2148 가까이 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 - 도종환 (132) 바람의종 2009.02.18 6698
2147 스스로 자기를 아프게 하지 말라 바람의종 2007.06.07 6688
2146 나는 너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고 싶다 바람의종 2012.06.12 6688
2145 지식 나눔 바람의종 2011.12.22 6686
2144 내 마음의 모닥불 바람의종 2012.11.05 6683
2143 행복의 양(量) 바람의종 2008.10.20 6681
2142 아배 생각 - 안상학 바람의종 2008.04.17 6679
2141 「똥개의 노래」(소설가 김종광) 바람의종 2009.06.09 6679
2140 '좋은 사람' 만나기 바람의종 2012.04.16 6679
2139 반짝이는 눈동자 바람의종 2012.09.26 6679
2138 세상은 아름다운 곳 - 도종환 (91) 바람의종 2008.11.11 6678
2137 숫사자의 3천번 짝짓기 바람의종 2009.04.30 6676
2136 용서 바람의종 2008.07.19 667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