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893 추천 수 1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봄은 소리 없이 옵니다.
겨우내 언 나뭇가지에 내려와 온종일 그 나무의 살갗을 쓰다듬으면서도 봄 햇살은 말이 없습니다. 메마를 대로 메마른 나무 둥치에 내려 나무의 살 속으로 들어가려다 저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될 것 같자 더 많은 친구들을 불러와 기어코 단단한 각질 아래로 스며들어가면서도 봄비는 조용합니다. 나무의 속을 적시고 새순을 키워 껍질 밖으로 밀어내면서도 봄비는 비명소리 한 번 지르지 않습니다.

웅크린 몸을 좀처럼 펴지 못하고 있는 꽃봉오리를 입김으로 조금씩 열어 내면서도 봄바람은 쇳소리를 내는 법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며 눈을 감고 있는 봉오리마다 찾아가 감싸고 다독이고 쓰다듬으며 꽃이 되게 하는 봄 햇살, 봄비, 봄바람은 늘 소리 없이 움직입니다.

혼자서 꽃을 피우는 꽃나무는 없습니다. 바람이 영혼을 불어넣어 주고 햇살이 몸을 데워 주며 빗방울이 실핏줄을 깨워 주고 흙이 흔들리는 몸을 붙잡아 주어 꽃 한 송이가 피는 것입니다. 꽃 한 송이 속에는 그래서 자연의 온갖 숨결이 다 모여 있고 우주의 수 없는 손길이 다 내려와 있습니다. 그걸 꽃이 제일 먼저 알기 때문에 조용할 줄 아는 것입니다. 시끄럽거나 요란하지 않고 모든 꽃이 다소곳할 줄 아는 것입니다. 아름답게 피었다가 저를 꽃으로 있게 해 준 자연의 품으로, 우주의 구극(究極) 속으로 말없이 돌아갈 줄 아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피는 꽃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그 꽃을 발견할 뿐입니다. 살아 끊임없이 움직이지 않고 하루아침에 꽃을 피우는 꽃나무는 없습니다. 꽃 한 송이를 둘러싼 우주의 모든 생명들이 오랜 세월 그 꽃과 함께 존재하고 일하고 움직이면서 꽃 한 송이를 피우는 것입니다. 억겁의 인연이 그 속에 함께 모여 꽃과 함께 나고 살고 아파하고 기뻐하며 살아 있는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7437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6982
439 진흙 속의 진주처럼 바람의종 2008.12.23 9213
438 질문의 즐거움 바람의종 2009.07.27 6925
437 질투와 시기심의 차이 風文 2015.04.28 8369
436 짐이 무거워진 이유 風文 2019.08.08 926
435 집 짓는 원칙과 삶의 원칙 - 도종환 (115) 바람의종 2009.01.23 5231
434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風文 2021.09.14 1171
433 집으로... 바람의종 2010.05.19 3725
432 집중력 바람의종 2009.02.01 7269
431 집중력 風文 2014.08.11 10469
430 집착하지 말라 바람의종 2011.08.12 5980
429 짧게 만드는 법 바람의종 2009.06.19 7296
428 짧은 기도 風文 2019.08.25 1103
427 짧은 치마, 빨간 립스틱 風文 2022.01.29 1114
426 짧은 휴식, 원대한 꿈 바람의종 2011.08.05 6452
425 째깍 째깍 시간은 간다 윤안젤로 2013.06.15 13339
424 차 맛이 좋아요 風文 2022.12.14 1070
423 차가운 손 바람의종 2009.12.01 6645
422 차가워진 당신의 체온 바람의종 2013.01.21 7520
421 차근차근 바람의종 2010.11.25 3738
420 차근차근 한 걸음 한 걸음 風文 2019.08.10 1175
419 차근차근 한 걸음, 한 걸음 바람의종 2010.05.12 4965
418 착한 사람 정말 많다 風文 2014.11.29 9627
417 찬란한 슬픔의 봄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5.09 8819
416 찰떡궁합 바람의종 2009.07.06 5896
415 참 좋은 글 - 도종환 (83) 바람의종 2008.10.20 700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98 99 100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