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604 추천 수 1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303232707&Section=04














봄은 먼데서 옵니다.

남쪽 먼 섬 비탈 밭이나 거기서 바다 쪽을 바라보며 섰던 매화나무 찬 가지에서부터 옵니다. 바람을 타고 옵니다. 바람을 데리고 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자기만 아는 거인」에 나오는 거인처럼 봄이 오는 정원에 높은 담을 쌓고 지내듯 문을 꼭꼭 걸어 닫고 지내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 문이란 문을 다 열어 놓았더니 바람이 더미 더미 창문을 타고 들어옵니다. 내 방 북쪽 창문도 열고 베란다가 있는 남쪽 이중창도 엽니다. 방안 가득 바람을 불러 드렸더니 머리 아픈 것이 조금씩 잦아듭니다. 답답하던 가슴도 풀리고 숨도 깊게 쉬어집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는 바람 냄새가 있습니다. 겨울바람에는 겨울바람의 냄새가 있고, 저녁 바람에는 저녁 바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겨울바람 속에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목을 파고 들어오던 거리의 냉기 그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머리맡에서 걸레가 얼던 월셋방 담 밑의 긴 골목 어둑어둑 하던 벽에 기대서서 꺼진 연탄불이 다시 붙기를 기다리던 날의 냄새가 있습니다.

저녁 바람 속에는 노을 묻은 바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강가를 따라 내려가며 오지 않는 것을 끝없이 기다리던 날들의 아득한 냄새가 들어 있습니다. 지친 몸 허기진 육신을 추스르며 혼자 저음의 노래를 부를 때 다가와 머리칼을 날리던 샛강의 냄새 같은 것이 묻어 있습니다.

봄날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다가와 얼굴을 쓰다듬는 봄바람에는 봄바람의 냄새가 스며 있습니다. 초년 교사 시절 처음 가보는 낯선 산골 학교, 부임 인사가 끝나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던 무렵 혼자 운동장 끝을 따라 거닐다 만났던 바람의 냄새가 떠오릅니다.

차가운 기운은 벗었지만 아직 완전히 따스한 몸으로 바뀌지 않은 봄바람이 앞산 기슭 온갖 나무와 꽃들의 묵은 껍질을 벗기려고 산비알을 따라 올라가다 내려오기를 여러 차례 꽃망울을 완전히 벗기진 못하고 내 곁에 내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 숨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낯설음도 곧 익숙해지겠지, 갑자기 바뀐 환경에도 서서히 적응해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걷는 동안 바람에 묻어오던 흙냄새 바람 냄새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낯익은 냄새에 실려 봄은 옵니다. 개울물이 땅을 녹이며 다시 살아난 벌레들과 물고기 새끼, 도롱뇽알, 개구리의 앳된 비린내를 한데 섞어 바람에 실려 보냅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4859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4272
3035 잠들기 전 스트레칭 風文 2024.05.29 43
3034 내 인생의 전성기 風文 2024.05.31 58
3033 눈깔사탕과 다이아몬드를 바꾼 사람들 風文 2024.05.31 64
3032 나이 든 사람의 처신 風文 2024.05.31 64
3031 몸의 명상 風文 2024.05.29 71
3030 위대한 마음의 발견 風文 2024.05.31 86
3029 시작이 반이다? 風文 2024.05.29 101
3028 요행을 바라는 사람들 風文 2024.05.29 111
3027 성공을 결정하는 질문 風文 2024.05.10 212
3026 밤하늘의 별 風文 2024.05.08 245
3025 평화, 행복, 어디에서 오는가 風文 2024.05.10 253
3024 무소의 뿔처럼 風文 2024.05.08 257
3023 배꼽은 늘 웃고 있다 風文 2024.05.08 281
3022 위대하고 보편적인 지성 風文 2024.05.08 314
3021 머리를 쥐어짜며 버텨본다 風文 2024.05.10 325
3020 가장 놀라운 기적 風文 2024.05.10 363
3019 샹젤리제 왕국 風文 2023.12.20 453
3018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48. 도전 風文 2021.09.13 465
3017 거룩한 나무 風文 2021.09.04 497
3016 논산 훈련소 신병 훈련병 風文 2021.09.04 508
3015 산골의 칼바람 風文 2023.12.18 508
3014 생각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風文 2023.03.07 530
3013 사랑의 소유욕 때문에 風文 2019.06.19 537
3012 감사 훈련 風文 2022.01.09 540
3011 발끝으로 서기까지 風文 2021.09.04 551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