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629 추천 수 1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303232707&Section=04














봄은 먼데서 옵니다.

남쪽 먼 섬 비탈 밭이나 거기서 바다 쪽을 바라보며 섰던 매화나무 찬 가지에서부터 옵니다. 바람을 타고 옵니다. 바람을 데리고 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자기만 아는 거인」에 나오는 거인처럼 봄이 오는 정원에 높은 담을 쌓고 지내듯 문을 꼭꼭 걸어 닫고 지내다 아침부터 머리가 아파 문이란 문을 다 열어 놓았더니 바람이 더미 더미 창문을 타고 들어옵니다. 내 방 북쪽 창문도 열고 베란다가 있는 남쪽 이중창도 엽니다. 방안 가득 바람을 불러 드렸더니 머리 아픈 것이 조금씩 잦아듭니다. 답답하던 가슴도 풀리고 숨도 깊게 쉬어집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에는 바람 냄새가 있습니다. 겨울바람에는 겨울바람의 냄새가 있고, 저녁 바람에는 저녁 바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겨울바람 속에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 목을 파고 들어오던 거리의 냉기 그 느낌이 들어 있습니다. 머리맡에서 걸레가 얼던 월셋방 담 밑의 긴 골목 어둑어둑 하던 벽에 기대서서 꺼진 연탄불이 다시 붙기를 기다리던 날의 냄새가 있습니다.

저녁 바람 속에는 노을 묻은 바람의 냄새가 있습니다. 강가를 따라 내려가며 오지 않는 것을 끝없이 기다리던 날들의 아득한 냄새가 들어 있습니다. 지친 몸 허기진 육신을 추스르며 혼자 저음의 노래를 부를 때 다가와 머리칼을 날리던 샛강의 냄새 같은 것이 묻어 있습니다.

봄날 아침 창문을 열었을 때 다가와 얼굴을 쓰다듬는 봄바람에는 봄바람의 냄새가 스며 있습니다. 초년 교사 시절 처음 가보는 낯선 산골 학교, 부임 인사가 끝나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아직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던 무렵 혼자 운동장 끝을 따라 거닐다 만났던 바람의 냄새가 떠오릅니다.

차가운 기운은 벗었지만 아직 완전히 따스한 몸으로 바뀌지 않은 봄바람이 앞산 기슭 온갖 나무와 꽃들의 묵은 껍질을 벗기려고 산비알을 따라 올라가다 내려오기를 여러 차례 꽃망울을 완전히 벗기진 못하고 내 곁에 내려와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 숨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낯설음도 곧 익숙해지겠지, 갑자기 바뀐 환경에도 서서히 적응해 갈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걷는 동안 바람에 묻어오던 흙냄새 바람 냄새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 낯익은 냄새에 실려 봄은 옵니다. 개울물이 땅을 녹이며 다시 살아난 벌레들과 물고기 새끼, 도롱뇽알, 개구리의 앳된 비린내를 한데 섞어 바람에 실려 보냅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6747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6213
2435 신묘막측한 인간의 몸 風文 2023.09.04 1021
2434 단도적입적인 접근이 일궈낸 사랑 風文 2022.08.21 1022
2433 오래 슬퍼하지 말아요 風文 2019.08.19 1023
2432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17, 18 風文 2023.06.09 1023
2431 피천득의 수필론 風文 2023.11.22 1025
2430 '고맙습니다. 역장 올림' 風文 2020.06.02 1027
2429 51. 용기 風文 2021.10.09 1028
2428 '밥은 제대로 먹고 사는지요?' 風文 2019.09.05 1029
2427 씨앗 뿌리는 사람이 많을수록 風文 2023.04.03 1031
2426 책을 '먹는' 독서 風文 2023.09.07 1031
2425 우정으로 일어서는 위인 風文 2020.07.01 1032
2424 진통제를 먹기 전에 風文 2023.01.27 1032
2423 유목민의 '뛰어난 곡예' 風文 2023.06.17 1033
2422 파도치는 삶이 아름답다 風文 2023.10.13 1033
2421 사랑으로 크는 아이들 風文 2020.06.21 1034
2420 이가 빠진 찻잔 風文 2019.08.06 1036
2419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1. 비어있음 - 궁극 風文 2020.05.27 1036
2418 불화의 목소리를 통제하라 風文 2022.01.29 1036
2417 '변혁'에 대응하는 법 風文 2020.05.07 1037
2416 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16. 모방 風文 2020.06.11 1038
2415 친절을 팝니다. 風文 2020.06.16 1038
2414 아하! 실마리를 찾았어요 風文 2022.01.30 1038
2413 벚꽃이 눈부시다 風文 2022.04.28 1038
2412 정신 건강과 명상 風文 2022.02.04 1039
2411 중심(中心)이 바로 서야 風文 2022.02.13 1039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