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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 - 도종환 (132)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자신을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거대한 도시. 수많은 집단. 그 속에 홀로 서 있는 한 개인. 이런 생각을 하면 나 자신의 존재는 한없이 미약하게만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군중들 사이에 서있는 자신을 남들에게 알리고 싶어 합니다. 고립된 자리에 물러나 있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나를 칭찬하는 소리에도 귀가 얇아지고, 박수소리만 들어도 금방 흔들립니다. 돈의 위력을 발견하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뛰어다니게 되고, 권력의 전지전능함을 맛보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길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단 하루도 남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쫓기듯 삶의 벌판을 누비고 다닙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우리는 조금씩 달라져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때 묻어 있고 혼탁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그 삶의 테두리를 벗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그런 어느 저녁 혼자 펴 보는 『채근담』한 쪽. 우리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샘물 옆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밤 깊어 사람소리 고요한 때에 홀로 일어나 앉아 내 마음을 관찰해 보면 비로소 망념(妄念)이 사라지고 참된 마음만이 홀로 나타남을 알면서도 망념에서 도피하기 어려움을 깨닫는다면 또한 이 가운데서 큰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리라.

권세와 이익과 사치와 화려함은 이것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을 깨끗하다고 하지만 이를 가까이 하면서도 물들지 않는 사람을 더욱 깨끗하다고 한다. 잔재주와 권모와 술수와 교묘함은, 이것을 모르는 사람을 높다고 하지만 이를 알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을 더욱 높다고 한다.


세리분화(勢利紛華). 권세와 명리와 사치스러움과 화려함은 사람들이 얼마나 동경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추악해집니까. 그래서 이런 것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고결하다고 합니다. 청렴하고 결백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멀리하기 위해 마음을 식은 재처럼 가지고 세상 모든 것과 관계를 끊어 버린 채 살아갈 수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비리와 불의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깨끗한 사람일 것입니다.

남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교묘하게 남을 속여 넘기거나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사람을 보면 우리는 그의 사람됨에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나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높은 인격을 가진 사람일 것입니다. 몰라서 못하는 사람과 알면서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후자가 훨씬 더 고매한 사람일 것입니다.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어도 꽃 그 자체는 흙 하나 묻지 않고 피어 있는 것처럼 그의 인격은 빛날 것입니다. 눅눅한 강가나 늪지에 알을 낳으면서도 그 새가 뻘흙 속에서만 살지 않고 푸른 하늘을 날며 살도록 키우는 새들처럼 그의 정신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벼가 너무 빽빽하게 심어져 있어 바람 하나 통하지 못하다가 서로 붙어 썩어 가는 병을 문고병이라 합니다. 많은 벼들이 함께 있으면서도 썩지 않고 자라는 것은 그들 사이에 최소한의 자기 존재를 지켜나갈 수 있는 거리와 여유를 확보해 주기 때문입니다. 함께 있으되 썩지 않으며, 여럿 속에 있으면서도 자신을 지켜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멈추어 있는 구름 같은 마음 가운데서도 솔개가 날고, 고요한 물결 같은 마음속에서도 물고기가 뛰노는 듯한 기상이 있어야 이것이 도를 깨달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본심을 잃거나 흔들리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대인이요, 상황과 때에 따라 마음을 잃고 흔들리는 사람을 소인이라고 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니 순간순간 어떤 일에 부딪칠 때마다 망심, 즉 허망한 생각과 삿된 마음에 빠지기 쉬운 게 우리 인간입니다. 그러나 고요한 밤 홀로 되어 가만히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와 보면 그곳에 아직도 덜 때 묻은 자기의 청정한 본심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소리 없이 되살아나는 본래의 무구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망심도 내 마음이요 진심도 내 마음이어 그게 한 마음의 다른 작용이었던 것을 알게 되면 내가 내일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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