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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무 - 도종환 (130)


목련나무의 봉오리가 붓끝처럼 휘어진 채 가지 끝에 얹혀 있습니다. 마당을 거닐다가 다가가서 손으로 만져보았습니다. 보기엔 붓끝 같지만 실제론 딱딱하였습니다. 손가락 끝에 닿는 느낌이 나뭇가지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산수유나무 꽃눈도 만져보니 마찬가지로 딱딱하였습니다. 겨울을 견디느라 몸 전체로 긴장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산에 있는 다른 나무들도 다 그럴 겁니다. 앙상한 가지만으로 겨울을 견디고 있는 그들의 몸은 텅 비어 있습니다. 날이 좀 풀리긴 했지만 겨울이 다 간 건 아닙니다. 몇 번 더 찬바람이 몰려오고 저수지가 다시 얼기도 하겠지요. 그걸 생각하며 빈 몸, 빈 가지로 침묵하고 있는 겨울 숲의 풍경은 삭막합니다.

사람들이 가진 걸 잃고 빈 몸이 된 걸 보면 우리는 쉽게 '이제 저 사람 끝났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직장을 쫓겨나거나 자리를 잃는 걸 볼 때도 그렇게 말합니다. 그동안 지녔던 꽃 같고 열매 같은 걸 지키지 못하면 '헛살았다'고 말합니다. 권력을 빼앗기는 걸 보면 '이제 너희 시대는 갔어' 라고 말합니다. 불명예스러운 일을 저지르고 손가락질 받는 걸 보면 함께 욕을 하며 등을 돌립니다.

그러나 나는 겨울나무들이 이제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겨울나무들은 지금 이 순간을 견디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계절을 살고 있으므로 꽃도 열매도 내려놓고 다만 침묵 속에 서 있는 것입니다. 칼바람 속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날도 있다고 나무들은 생각할 겁니다. 앙상한 저 나무들이 지난날 숲을 이루고 산맥의 큰 줄기를 지켜왔던 걸 나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꽃 같고 열매 같던 걸 지키지 못했지만 아직 끝났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네겐 더 기대할 게 없다'고 말한 사람 중에도 겨울나무처럼 견디고 있는 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작은 언덕과 같은 공동체도 그들이 물러서지 않고 거기 있었기 때문에 지킬 수 있었고, 한 시대 또한 그들로 인해 부끄럽지 않았던 걸 기억하게 하는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누가 헛살았다 말하는가 열매 다 빼앗기고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저 헐벗은 나무들이 산을 지키고
숲을 이루어 내지 않았는가
하찮은 언덕도 산맥의 큰 줄기도
그들이 젊은 날 다 바쳐 지켜오지 않았는가
빈 가지에 새 없는 둥지 하나 매달고 있어도
끝났다 끝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실패하였다고 쉽게 말하지 말라
이웃 산들이 하나씩 허물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킬 자리가 더 많다고 믿으며
물러서지 않고 버텨온 청춘
아프고 눈물겹게 지켜낸 한 시대를 빼놓고

--- 졸시 「겨울나무」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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