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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02 22:17

설날 - 도종환

조회 수 5714 추천 수 1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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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 도종환


밤에도 하얗게 눈이 내렸습니다. 쌓인 눈 위에 또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하고 차들도 거북이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눈 때문에 걱정을 하면서 저도 버스를 타고 무사히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옛날 우리들처럼 설을 기뻐하며 기다리는 것 같지 않습니다. 설 전날 밤 일찍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해서 졸린 눈을 비비며 잠들지 않으려고 애쓰던 생각이 납니다. 장에 가서 설날 차례 상에 올릴 음식을 장만해 오고, 전을 부치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집안을 흘러 다니고, 방금 떡 방앗간에서 해 온 가래떡에서 따뜻한 김이 하얗게 솟아오르는 걸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습니다. 오고가며 얻어먹는 부침개며 막과자가 하루 종일 기분을 좋게 만들었습니다. 김종해 시인은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주신 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설날은 어머니가 빚어 주셨다
밤새도록 자지 않고
눈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어머니 곁에서
나는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올랐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내 꿈은 달아오르고
밖에선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렸다
매화꽃이 눈 속에서 날리는
어머니의 나라
어머니가 이고 오신 하늘 한 자락에
누이는 동백꽃 수를 놓았다
섣달 그믐날 어머니의 도마 위에
산은 내려와서 산나물로 엎드리고
바다는 올라와서 비늘을 털었다
어머니가 밤새도록 빚어놓은
새해 아침 하늘 위에
내가 날린 방패연이 날아오르고
어머니는 햇살로
내 연실을 끌어올려 주셨다

---김종해 「어머니의 설날」

이 밤 "눈오는 소리를 흰 떡으로 빚으시는 / 어머니 곁에서 / 애기까치가 되어 날아" 오르던 어린 시절의 설날을 생각합니다. 빨간 화롯불 가에서 기쁘게 달아오르던 내 꿈을 생각합니다.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가슴을 달뜨게 하던 그 꿈 때문에 "밖에선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눈이 내"리던 어린 날을 생각합니다. 그 꿈을 하나씩 버리면서 우리는 나이가 들었습니다. 까치 소리를 들으면서 기쁜 소식이 찾아오길 바랐고, 우리 자신이 한 마리 어린 기쁨의 까치였던 날들은 가고 우리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설이 되면 무엇을 빚고 있는 걸까요? 무슨 소망을 빚어가고 있을까요? 우리에게 설날을 빚어 주시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실까요? 어머니가 산나물을 무치시면 산도 거기까지 따라 내려오고, 생선을 만지시면 바다가 올라와서 비늘을 털던 어머니는 지금 어떤 나라를 만들고 계실까요? 그런 어머니의 나라는 지금 지상 어디에 있는 걸까요?

설 전날 밤 내리는 눈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이라고 생각하던 그 마음으로 맞이하는 설날이길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이 날리는 연이 어머니가 햇살로 끌어올려주시는 연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그런 설날이길 바랍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래도 꿈이 달아오르는 설날이길 바랍니다.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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