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5433 추천 수 9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따뜻한 사람의 숨결


저녁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옷 속으로 스미는 한기가 몸을 부르르 떨게 합니다. 장작을 더 가지러 가려고 목도리를 두르다가 윗집에서 저녁 먹으러 오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건 장작불이 아니라 사람의 온기입니다. 김치찌개에 냉이국을 차려 놓은 소박한 저녁상이지만 여럿이 둘러앉아 먹으니 몸과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많이 먹어야 배부른 게 아닙니다. 좋은 음식을 먹어야만 잘 먹는 게 아닙니다. 함께 먹어야 맛이 있고 나누어 먹어야 즐겁게 먹는 것입니다.

그렇다 이리역에서 멈췄다가
김제 외애밋들 지평선을 지나는 비둘기호를 타고
찐 달걀 두어 개
소금 발라
하나쯤 옆 자리 아이에게 주고나서
내다보는 초겨울 들이여
빈 들 가득 입 다문 사람의 숨결이여
아무리 모진 때 살아왔건만
순된장이여 진흙이여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따뜻한 사람의 숨결이여

고은 시인은 「목포행」이란 시에서 아무리 모진 때를 살아왔어도 변함없는 것은 '따뜻한 사람의 숨결' 이라고 합니다. 역마다 멈춰서는 비둘기호를 타고 가다가도 찐 달걀 두어 개 소금 발라 옆자리 아이와 나누어 먹는 이런 마음이야말로 사람의 숨결이 살아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비둘기호열차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타는 열차입니다. 이리에서 출발하여 김제평야를 완행의 속도로 지나가는 길은 지루하고 먼 길입니다. 그 길을 입 다물고 가는 사람들은 진흙 같은 사람들입니다. 순된장의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삶에는 어떤 세월이 와도 변함없이 따뜻한 사람의 숨결이 있습니다. 겨울이 되어 황량해진 들판 위로 바람만이 몰아쳐도 달걀 하나라도 서로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이들이 부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따뜻한 사람입니다. 된장냄새 아니, 사람 냄새 나는 이들입니다. 나도 오늘 저녁 찐 달걀 껍질을 벗기고 싶습니다. 하얀 달걀 속살에 소금 발라 한 입 베어 물고 싶습니다. 그러다 한 개는 옆 자리에 있는 이에게 건네고 싶습니다. 나도 저녁상 차려 놓고 밥 먹으러 오라고 소리쳐 부르고 싶습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2708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2101
360 산맥과 파도 - 도종환 (121) 바람의종 2009.01.24 4723
359 군고구마 - 도종환 (120) 바람의종 2009.01.24 5608
358 화이부동(和而不同) - 도종환 (119) 바람의종 2009.01.24 5334
357 눈 내리는 벌판에서 - 도종환 (118) 바람의종 2009.01.24 4217
356 모두 다 당신 편 바람의종 2009.01.23 4580
355 꿈을 안고.... 바람의종 2009.01.23 3459
354 향기로운 여운 바람의종 2009.01.23 5869
353 '10분만 문밖에서 기다려라' 바람의종 2009.01.23 4763
352 세 가지 즐거움 - 도종환 (117) 바람의종 2009.01.23 6409
351 새해 산행 - 도종환 (116) 바람의종 2009.01.23 6303
350 집 짓는 원칙과 삶의 원칙 - 도종환 (115) 바람의종 2009.01.23 5075
349 출발점 - 도종환 (114) 바람의종 2009.01.23 4851
348 슬픔을 겪은 친구를 위하여 바람의종 2008.12.30 4728
347 남들도 우리처럼 사랑했을까요 바람의종 2008.12.30 6571
346 아남 카라 바람의종 2008.12.30 6126
345 따뜻한 상징 - 도종환 (113) 바람의종 2008.12.30 5646
344 어떤 이가 내게 정치소설가냐고 물었다 - 이외수 바람의종 2008.12.28 9043
343 눈 - 도종환 (112) 바람의종 2008.12.27 7887
342 희망의 스위치를 눌러라 바람의종 2008.12.27 8411
341 이제 다섯 잎이 남아 있다 바람의종 2008.12.26 5603
340 외물(外物) 바람의종 2008.12.26 6455
339 예수님이 오신 뜻 - 도종환 (111) 바람의종 2008.12.26 5332
338 자랑스런 당신 바람의종 2008.12.23 7634
337 진흙 속의 진주처럼 바람의종 2008.12.23 9012
336 하늘에 반짝반짝 꿈이 걸려있다 바람의종 2008.12.23 5970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1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