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513 추천 수 1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십일월도 하순 해 지고 날 점점 어두워질 때
비탈에 선 나무들은 스산하다
그러나 잃을 것 다 잃고
버릴 것 다 버린 나무들이
맨몸으로 허공에 그리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건 이 무렵이다
거기다 철 이른 눈이라도 내려
허리 휘어진 나무들의 모습은 숙연하다
이제 거둘 건 겨자씨만큼도 없고
오직 견딜 일만 남았는데
사방팔방 수묵화 아닌 곳 없는 건 이 때다
알몸으로 맞서는 처절한 날들의 시작이
서늘하고 탁 트인 그림이 되는 건

십일월 하순, 이맘때쯤이면 잎이란 잎은 다 집니다. 나뭇잎을 다 잃고 비탈에 선 나무들도 우리도 마음 스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 앉아 바라보면 비탈과 능선에 선 나무들이 이때 오히려 더 아름답습니다. 잎이 다 지고나면 나무들은 알몸의 빈 가지만 남게 되는데 그 세세한 잔가지들이 능선을 따라 이어지며 그리는 그림이 그야말로 한 폭의 풍경화입니다. 아니 "사방팔방 수묵화 아닌 곳 없"습니다.

이제 겨울이 오고 찬바람 불고 눈발이 몰아칠 터인데, 알몸으로 맞서야 하는 처절한 날들만이 남았는데 그 모습이 그림입니다. 가진 것 다 잃고 오직 견딜 일만 남았는데도 그것이 탁 트인 그림이 되는 십일월 하순의 풍경을 보며 인생의 깨달음 하나를 얻습니다. 우리의 처절한 삶을 어떻게 아름다운 그림으로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6609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6070
335 이상주의자의 길 - 도종환 (49) 바람의종 2008.07.28 8749
334 김성희의 페이지 - 가을가뭄 바람의종 2008.10.30 8755
333 체 게바라처럼 바람의종 2012.10.04 8766
332 손톱을 깎으며 風文 2015.03.11 8766
331 오늘을 위한 아침 5분의 명상 바람의종 2008.03.20 8768
330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남는다 바람의종 2012.11.01 8772
329 이해인 수녀님께 - 도종환 (54) 바람의종 2008.08.09 8776
328 찬란한 슬픔의 봄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5.09 8802
327 추억의 기차역 바람의종 2012.10.15 8814
326 행복한 농사꾼을 바라보며 바람의종 2008.04.22 8834
325 결혼 서약 바람의종 2012.10.15 8836
324 사랑에 목마른 사람일수록 바람의종 2012.06.11 8837
323 성숙한 지혜 바람의종 2012.12.10 8837
322 함께 산다는 것 風文 2014.12.24 8837
321 「밥 먹고 바다 보면 되지」(시인 권현형) 바람의종 2009.06.25 8844
320 한 번의 포옹 風文 2014.12.20 8861
319 '애무 호르몬' 바람의종 2011.09.29 8864
318 깨기 위한 금기, 긍정을 위한 부정 바람의종 2008.02.15 8876
317 「첫날밤인데 우리 손잡고 잡시다」(시인 유안진) 바람의종 2009.05.17 8878
316 행복한 사람 - 도종환 (50) 바람의종 2008.08.01 8889
315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윤안젤로 2013.03.23 8889
314 한 모금의 기쁨 風文 2015.08.05 8895
313 가장 큰 재산 / 도종환 바람의종 2008.05.29 8896
312 '땅 위를 걷는' 기적 風文 2015.04.20 8907
311 내 사랑, 안녕! 風文 2014.08.11 8917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02 103 104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