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6405 추천 수 1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십일월도 하순 해 지고 날 점점 어두워질 때
비탈에 선 나무들은 스산하다
그러나 잃을 것 다 잃고
버릴 것 다 버린 나무들이
맨몸으로 허공에 그리는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건 이 무렵이다
거기다 철 이른 눈이라도 내려
허리 휘어진 나무들의 모습은 숙연하다
이제 거둘 건 겨자씨만큼도 없고
오직 견딜 일만 남았는데
사방팔방 수묵화 아닌 곳 없는 건 이 때다
알몸으로 맞서는 처절한 날들의 시작이
서늘하고 탁 트인 그림이 되는 건

십일월 하순, 이맘때쯤이면 잎이란 잎은 다 집니다. 나뭇잎을 다 잃고 비탈에 선 나무들도 우리도 마음 스산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 앉아 바라보면 비탈과 능선에 선 나무들이 이때 오히려 더 아름답습니다. 잎이 다 지고나면 나무들은 알몸의 빈 가지만 남게 되는데 그 세세한 잔가지들이 능선을 따라 이어지며 그리는 그림이 그야말로 한 폭의 풍경화입니다. 아니 "사방팔방 수묵화 아닌 곳 없"습니다.

이제 겨울이 오고 찬바람 불고 눈발이 몰아칠 터인데, 알몸으로 맞서야 하는 처절한 날들만이 남았는데 그 모습이 그림입니다. 가진 것 다 잃고 오직 견딜 일만 남았는데도 그것이 탁 트인 그림이 되는 십일월 하순의 풍경을 보며 인생의 깨달음 하나를 얻습니다. 우리의 처절한 삶을 어떻게 아름다운 그림으로 바꾸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도종환 시인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風文 2023.02.04 13123
공지 친구야 너는 아니 1 風文 2015.08.20 102510
2735 감정이 바닥으로 치달을 땐 風文 2020.05.02 705
2734 출근길 風文 2020.05.07 705
2733 세상 모든 사람이 날 좋아한다면 風文 2022.01.29 705
2732 어느 날은 해가 나고, 어느 날은 비가 오고 風文 2022.04.28 705
2731 튼튼한 사람, 힘없는 사람 風文 2023.01.04 705
2730 더도 덜도 말고 양치하듯이 風文 2022.01.11 706
2729 아무나 만나지 말라 風文 2019.08.21 707
2728 나는 나다 風文 2020.05.02 707
2727 잇몸에서 피가 나왔다? 風文 2022.02.24 709
2726 우주의 자궁 風文 2023.06.07 709
2725 새날 風文 2019.08.06 711
2724 '그저 건강하게 있어달라' 風文 2022.01.26 711
2723 마음을 담은 손편지 한 장 風文 2023.05.22 711
2722 9. 아테나 風文 2023.10.18 711
2721 '의미심장', 의미가 심장에 박힌다 風文 2024.02.08 711
2720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風文 2020.05.07 712
2719 내 인생의 '가장 젊은 날' 風文 2023.05.28 712
2718 끝까지 가봐야 안다 風文 2019.08.13 713
2717 불화의 목소리를 통제하라 風文 2022.01.29 713
2716 삶을 풀어나갈 기회 風文 2022.12.10 714
2715 '억울하다'라는 말 風文 2023.01.17 714
2714 교실의 날씨 風文 2023.10.08 714
2713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7.3. 뮤즈 風文 2023.11.20 714
2712 어린이를 위하여 風文 2020.07.02 715
2711 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 - 7.1. 風文 2023.11.14 71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