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7362 추천 수 1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무더기 무더기 모여 저희끼리 서로 의지하고 끌어안은 채 추위를 견디는 애기 들국화가 곱다. 그런 애기 들국화나 고갯길에 피어 있는 보랏빛 작은 구절초 그들이 보여주는 애틋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싸아해져 온다.

천상병 시인은

"산등성이 넘는 길 / 애기 들국화 // 가을은 다시 올까 / 다시 올테지 /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 지금처럼 / 순하게 겹친 / 이 순간이"

이렇게 애기 들국화를 보고 노래했다. 가을이야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나면 다시 오는 거지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애기 들국화 잎들처럼 그렇게 순하게 겹쳐져 있던 그런 가을은 정말 다시 오는 것일까를 시인은 묻고 있는 것이다. 매년 들국화를 대하면서 사실 한 번도 들국화에 대해서 내가 느끼는 남다르게 애틋한 심정을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어제는 건널목 옆 빈터에 차를 세우고 전봇대 너머 들판 끝으로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보았다. 가끔씩 느리게 지나가는 화물차 사이사이로 하늘은 주홍색 장작불꽃을 피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타오르다 구름이 먼저 조금씩 어두워지고 나중에는 불에 타던 것들이 사위는 불꽃과 함께 검게 변하며 재가 되는 것처럼 하늘도 그렇게 거대하게 타다가 재가 되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그 속에서 사리처럼 반짝이며 나타나는 별을 보며 죽어버린 하늘에서 다시 솟아나는 목숨의 의미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느낌을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차가운 길가에 옹송거리며 저희끼리 모여 있는 나뭇잎들, 늦가을 저녁 서늘한 밤공기의 느낌, 저무는 저녁 햇살을 받고 서 있는 억새풀의 굽은 어깨, 멀리서 보이는 동네입구 느티나무의 넉넉한 자태, 눈에 갇힌 산골마을의 외딴 집에서 솟아오르는 굴뚝 연기, 내색하지 않고 속으로만 좋아하던 사람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 손안에 쏙 들어오는 살의 감촉, 세상에는 글로 다 표현이 되지 않는 느낌들이 많다. 글 쓰는 사람이지만 정말 그것만은 아직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있다.


'씨크릿 가든'의 어느 부분 또는 그리그의 '솔베이지 노래' 첫 두 소절을 듣다가 여기서 그만 생을 멈추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앞으로 더 잘 살 것 같지 않아서, 남은 날들 그저 때 묻고 부끄럽고 욕되게 살다가 갈 것만 같아서 차라리 이쯤에서 제 살을 깎아 먹고 사는 삶을 멈추어 버리는 게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 있다. 그러나 더 선명하게 그 느낌 그 이유를 글로 표현하려고 해도 잘 표현되지 않는다. 가슴을 후려치던 피아노 소리의 느낌, 그 낱낱의 소리들을 따라가다 초겨울의 낙엽처럼 길가에 마구 뒹굴고 말던 내 마음이 글로는 하나도 표현되지 않을 때가 있다.

아, 어쩌면 좋은가. 글을 쓰는 일이 직업이 되어 있는데도 글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으니.



도종환 시인


  1. No Image notice by 風文 2023/02/04 by 風文
    Views 15969 

    역대로 사람의 진정한 역사는 - 세종대왕

  2. 친구야 너는 아니

  3. No Image 26May
    by 바람의종
    2008/05/26 by 바람의종
    Views 7342 

    오늘 다시 찾은 것은

  4. No Image 27Aug
    by 바람의종
    2008/08/27 by 바람의종
    Views 7340 

    오솔길 - 도종환 (61)

  5. No Image 14Nov
    by 바람의종
    2008/11/14 by 바람의종
    Views 7335 

    기분 좋게 살아라

  6. No Image 05Jul
    by 風文
    2015/07/05 by 風文
    Views 7334 

    기본에 충실하라!

  7. No Image 12Jan
    by 風文
    2015/01/12 by 風文
    Views 7333 

    행복 습관, 기쁨 습관

  8. No Image 23Oct
    by 바람의종
    2008/10/23 by 바람의종
    Views 7332 

    눈물 속에 잠이 들고, 기쁜 마음으로 일어났다

  9. No Image 19Jun
    by 바람의종
    2008/06/19 by 바람의종
    Views 7330 

    우산

  10. No Image 12Dec
    by 바람의종
    2008/12/12 by 바람의종
    Views 7330 

    4.19를 노래한 시 - 도종환 (106)

  11. No Image 03Feb
    by 바람의종
    2009/02/03 by 바람의종
    Views 7329 

    출발 시간

  12. No Image 12Nov
    by 바람의종
    2008/11/12 by 바람의종
    Views 7327 

    앞에 가던 수레가 엎어지면 - 도종환 (93)

  13. No Image 25Apr
    by 바람의종
    2008/04/25 by 바람의종
    Views 7322 

    입을 여는 나무들 / 도종환

  14. No Image 06Aug
    by 바람의종
    2009/08/06 by 바람의종
    Views 7316 

    「의뭉스러운 이야기 2」(시인 이재무)

  15. No Image 24Dec
    by 風文
    2014/12/24 by 風文
    Views 7312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16. No Image 10Dec
    by 風文
    2016/12/10 by 風文
    Views 7311 

    이발소 의자

  17. No Image 21Jun
    by 바람의종
    2008/06/21 by 바람의종
    Views 7298 

    목민관이 해야 할 일 / 도종환

  18. No Image 11Nov
    by 바람의종
    2008/11/11 by 바람의종
    Views 7297 

    안네 프랑크의 일기 - 도종환 (89)

  19. No Image 11Jul
    by 바람의종
    2012/07/11 by 바람의종
    Views 7296 

    성공의 법칙

  20. No Image 13Dec
    by 風文
    2014/12/13 by 風文
    Views 7292 

    "아래를 내려다보지 말라"

  21. No Image 18Jan
    by 風文
    2015/01/18 by 風文
    Views 7291 

    마른 하늘에 벼락

  22. No Image 15May
    by 윤안젤로
    2013/05/15 by 윤안젤로
    Views 7290 

    '잘 사는 것'

  23. No Image 11Jul
    by 바람의종
    2012/07/11 by 바람의종
    Views 7289 

    우리집에 핀 꽃을 찍으며

  24. No Image 23Aug
    by 바람의종
    2012/08/23 by 바람의종
    Views 7286 

    혼자 노는 법

  25. No Image 21Jul
    by 바람의종
    2008/07/21 by 바람의종
    Views 7283 

    평화의 촛불 - 도종환

  26. No Image 08Aug
    by 바람의종
    2008/08/08 by 바람의종
    Views 7283 

    다른 길로 가보자

  27. No Image 14Mar
    by 바람의종
    2009/03/14 by 바람의종
    Views 7283 

    잘 살아라. 그것이 최고의 복수다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 122 Next
/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