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가을 - 도종환 (96)

by 바람의종 posted Nov 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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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멈추어 있는 가을을 한 잎 두 잎 뽑아내며 저도 고요히 떨고 있는 바람의 손길을 보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꼭 한 번 이렇게 아름답게 불타는 날이 있다는 걸 알려 주며 천천히 고로쇠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만추의 불꽃을 보았어요
(......)
가장 많은 것들과 헤어지면서 헤어질 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며시 돌아눕는 산의 쿨럭이는 구릿빛 등을 보았어요

어쩌면 이런 가을 날 다시 오지 않으리란 예감에 까치발을 띠며 종종대는 저녁노을의 복숭아빛 볼을 보았어요

깊은 가을,

마애불의 흔적을 좇아 휘어져 내려가다 바위 속으로 스미는 가을 햇살을 따라가며 그대는 어느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또 혼자 깊어가고 있는지요

제 시 「깊은 가을」입니다. 나뭇잎들이 나무와 하나씩 하나씩 헤어지고 있습니다. 나뭇잎들이 깃들어 살던 산과 결별, 결별하고 있습니다. 나뭇잎을 하나씩 열씩 뽑아내며 바람은 고요히 떨고 있고, 헤어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돌아눕는 산의 구릿빛 등이 숙연합니다.

편안하고 낯익던 시간들과 결별하는 늦가을입니다. 헤어지면서 아름답게 불타는 가을입니다. 나무에게도 황혼이 찾아온 것입니다. 제 안에서 노을이 물들고 있는 것입니다.

결별하는 가을을 향해 나는 금관악기를 붑니다. 헤어지는 것들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루 종일 음악을 들려주는 일입니다. 이 소리 그대도 듣고 있는지요? 어느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혼자 깊어가고 있을 그대도 온 산의 나무들이 헤어지며 내는 이 아프고 아름다운 소리 듣고 있는지요?


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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